1970년 대 초반, 필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축제기간이나 학생회장 선거철만 되면 학생회관을 비롯하여 빈 강의실 곳곳이 선거 캠프가 되거나 술꾼 친구들이 벌리는 술판으로 난장판이 되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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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수 시인 |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주맹(酒盲)이다. 따라서 학생회장 선거 때가 되어 선거캠프를 방문하면 불문곡직 막걸리 사발부터 내 민 후에 지원을 부탁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캠프 방문을 자제하게 되지만 선거운동을 하는 친구가 캠프에 한번 와 달라고 간청하면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므로 방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가 목전에 있던 어느 날, 필자는 싹싹 비는 친구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몇 군데의 선거캠프를 방문하게 되었고, 방문할 때 마다 권하는 막걸리를 마시는 시늉만으로 입을 댄 것에 벌써 얼굴은 고주망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촌의 이화여대 앞 사거리 맞은 편 골목 길 안쪽에(마포구 염리동으로 기억된다) 있는 후보의 선거캠프를 방문하여 억지 술 한 잔을 또 얻어 마시게 되었다.
이미 전주(前酒)가 있던 필자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되었고, 숨소리 마저 헉헉거리게 되었다.
그 때가 낮 12시도 안된 오전이었고, 오후에는 학교로 가서 꼭 들어야 할 강의가 있었지만 대낮부터 술에 취한 상태로는 갈 수가 없어 결국 수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 위하여 이화여대 사거리 앞에 있던 육교를 건너게 되었다.
육교를 터벅터벅 올라 건넌 후 버스정류장이 있는 신촌로타리 쪽 계단을 내려 오다가 계단이 거의 끝날 무렵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넘어지면서 발은 육교 계단에, 머리는 길바닥을 향하는 자세가 되었다.
그런데 넘어져 길바닥에 눕게 되자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기왕 누운 김에 한숨자고 가자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길을 가다가 넘어질 일도 없고, 설사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누가 볼세라 잽싸게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떼고 가던 길을 갔겠지만 몇 잔 술에 얼큰하게 취해버린 나는 술기운 덕에 마침 자리(?)에 누운 김에 한숨 자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숨 늘어지게 자고 막 잠에서 깨려고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여학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야, 미친놈, 벌건 대낮에 길바닥에 술에 취해 자고 있네.” 하는 소리에 나는 실눈을 살그머니 뜨고 보니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내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뒤돌아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남학생들은 ‘히피풍’이라고 하여 여학생 못지않게 장발을 하고 다녔고, 여학생들의 치마는 ‘무릎 위 15㎝의 초미니 스타일’이 유행이었던 때가 아닌가. 경찰은 수시로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을 하던 시기였고, 서유석의 노래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 나갔죠...(제목은 까 먹었음)” 가 한창 불리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여학생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누워 있는 내 옆을 지나갈 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내려오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 버렸다.
나도 멋쩍어 그대로 눈을 감고 자는 척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웬 할아버지 소리가 들린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저런 술주정뱅이를 키우는 부모가 불쌍하다. 저런 놈이 커서 뭐가 되겠노...쯧쯧.” 하면서 지나가신다.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맥주 반잔, 소주 반잔이 정량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이렇게 평생 술과는 절연을 하고 사는 내게도 이렇게 어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주사를 부린 추억이 남아 있고, 인간되기는 글렀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이제 나도 손자, 소녀를 둔 할아버지로서 이따금 길거리에서 엉뚱한 짓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과거 나의 주사(?)를 경험삼아 전체 상황을 모른 채 하나의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름지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속담(俗談)이 속단(速斷)이 안되길 기대해 보는 장마철의 단상이다.
본지 필진, 시인, 수필가,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http://www.bulgyonews.co.kr/news/36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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