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묘시(卯時)가 되자 여인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칡나무 넝쿨로 칭칭 동여매어 놓아 꼼짝 달싹 할 수가 없었다. 여인의 몸부림에 치맛자락이 풀어지면서 여우 꼬리가 나타났는데 저고리 위 얼굴은 분명히 여인이었지만 치마에서 삐져나온 하체는 여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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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수 시인 |
잠에서 깬 가학이 여인의 얼굴에 여우 꼬리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여우에게 다가가 호통쳐서 가로되
“요망한 것,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동안 요망한 네가 부처님의 제자 여러 명을 잡아먹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네가 죽더라도 원통해 하지 마라.”
하고는 구덩이에 장작을 포개 넣고 불을 지핀 후 이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려고 하자 여우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만약 살려 준다면 그 은혜로서 둔갑술(遁甲術) 책을 주겠노라고 제의하였다.
가학이 요사한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네가 둔갑술을 배웠다면 어찌 능히 이 줄을 풀지 못하느냐고 다그치자 여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둔갑을 하여 빠져 나갈 수가 있지만 손이 닿지 않는 등 뒤의 칡넝쿨 줄에 부적을 써 붙여 놓았기 때문에 그 부적 때문에 자신의 둔갑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과연 가학은 여우를 묶으면서 행여하는 마음에 하얀 비단 천에 붉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부적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여우의 둔갑술이 통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우가 애원을 하면서 이 동굴 속에 나만 아는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책이 있으니 가져다가 읽어 보라고 하였고, 가학은 여우가 가르쳐 준대로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머리통만한 돌멩이를 밀자 신기하게도 돌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조그마한 공간이 나왔고, 이 공간에 오래되어 낡은 냄새가 나는 책이 한 권 나왔다. 가학은 이 책을 밝은 곳으로 가지고 나와 읽어 보니 무궁무진한 도술이 적혀 있는 둔갑술 책이 틀림없으므로 약속대로 풀어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우를 풀어 준 후 자유로워진 여우가 공격을 하면 가학으로도 능히 당해 낼 수가 없으므로 일단 둔갑술을 다 익힌 후에 풀어 주겠다고 하고 책 읽기에 여념이 없었고 마침내 동이 훤히 트고 난 후 사시(巳時)가 될 무렵에는 모두 읽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가학은 숨도 쉬시지 않고 읽기에 몰두한지라 여우를 감시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여우는 줄에 묶힌 채 뒤집어지고 바로 하고 뒹굴기도 하면서 발광을 하다가 등 뒤 칡넝쿨 줄에 붙여 놓은 부적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부적이 떨어지자 여우는 어느새 새끼 여우로 둔갑하여 줄에서 빠져나온 후 다시금 원래 크기의 여우로 변하여 책 읽기에 몰두하여 사태를 모르는 가학에게 달려들어 가학이 읽고 있는 책을 빼앗아 달아났다.
마지막 한 장을 읽지 못하므로 가학은 비록 둔갑을 하더라도 옷고름을 감추지 못하는 미완의 둔갑술만 배우게 되었다.
가학은 그 후로도 용방사에 오면 꼭 이 여우굴에서 마지막 익히지 못한 둔갑술을 완성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용방사는 의상대사가 정취암을 창건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포교와 정진을 하다가 서기 702년(신라 성덕왕 1년) 입적하였는데 의상대사가 입적하기 10여 년 전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용방사를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의상대사가 거처로서 사용하려고 정취암에 달린 부속 암자로 건립하였으나 이 용방사 터가 워낙 신묘하여 오히려 정취암보다 더 큰 규모의 사찰이 되어 용방사가 되었고, 정취암은 용방사의 말사(末寺) 격인 암자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인생만사도 새옹지마인데 사찰도 역시 인간세(人間世)의 속설을 따라가나 보다.
용방사가 처음에는 정취암의 부속 암자의 역할을 하였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정취암보다 더 큰 규모가 되어 용방사로 독립하여 존재하더니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이성계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정취암은 살아남았으나 용방사는 끝내 말살되는 지경에 이르러 오늘 날에는 거저 사람들의 구전이나 옛 문헌의 한 편린(片鱗)으로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의상대사가 창건하신 용방사지만 문가학의 여우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이 여우굴 전설과 용방사, 문가학은 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문가학의 신통한 도술, 비록 마지막 장을 읽지 못한 관계로 미완(未完)이기는 하지만 단지 전설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수소문한 끝에 지금 이 여우굴에 부처님을 모시고 용맹정진을 하시는 용방사 주지스님이신 도윤스님으로 부터 용방사의 내력에 대하여 물어 보기로 한다.
현재 스님은 여우굴에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정진을 하는데 옛 용방사의 위용을 갖춘 불사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일단 능인암(능인암)이라는 명칭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스님에게 용방사에 대한 말씀을 올리기가 무섭게 스님의 안광이 빛나면서 막힘없는 설명을 해주신다.
스님은 둔갑술, 여우굴이라는 것은 전설로 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문가학의 신통력은 조선 태종 임금에게 직접 시범을 보일 정도로 공인되었고, 그 과정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릴 정도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용수 시인, 수필가,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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