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우리 몸이라는 집약체로 모였던 원소들이 흩어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산자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자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존재는 아니라고 하였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결국 아무런 존재의의를 가지지 않는 무념물(無念物)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동양 철학을 대표하는 불교에서는 육신(肉身)의 죽음은 또 다른 법신(法身)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므로 일체의 미혹과 속박, 집착에서 벗어나는 윤회의 과정으로 보았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의 집약체로 모이는 탄생과 그것이 흩어지는 죽음을 통하여 끝없는 윤회를 되풀이하다 마침내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에 이름으로서 윤회로 부터도 벗어나는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라고 하였다.
경남 산청에는 청룡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내가 자주 가던 절이었는데 그 절의 주지스님이 구정 연휴를 일주일 정도 앞 둔 어느 날 입멸(入滅)하였다.
법랍 28년의 창창한 젊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갑자기 백혈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하던 중 발심, 수행하여 계를 받아 스님(법명, 天眞스님)이 되었고 청룡사의 주지 스님으로 보임 받아 구도의 길을 가게 되자 스님의 어머니인 연화심 보살도 스스로 공양주가 되었다.
스님이 공부를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병이 그렇게 깊지를 않았으나 계를 받은 후 그 뜨거운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정진을 거듭하는 혹사를 한 끝에 지병이 악화되어 마침내 삶과 죽음을 오가는 투병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주 한 번씩 등골에서 골수를 뽑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뽑고, 수혈을 하고 약물을 투입해야 했다. 몇 번에 걸쳐 두개골을 절단하여 종양을 제거하는 뇌수술까지 하였다. 그러나 병은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가망이 없으므로 퇴원을 하라는 말을 듣고 연화심 보살은 의식 불명 상태의 스님을 청룡사 절로 모시고 와서 그때부터 사랑과 헌신으로 보살피는 기나긴 간병이 시작되었다.
당초 병원에서는 곧 사망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예상외로 스님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여 어느덧 콧줄을 빼고 스스로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기분이 좋은 날에는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보살은 세상의 어떤 어머니도 따라 올 수 없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주었다.
잠시도 떠나지 않고 스님 곁을 지키면서 하루 7~8차례 약을 먹이는데 알약 형태의 약은 목에서 넘길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갈고, 또 물같이 묽은 액체는 자칫 기도로 넘어가 폐렴 등의 또 다른 질환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과일이나 당근, 오이 등 신선한 야채를 우유나 야쿠르트 등과 함께 갈아 젤 형태로 만들어 마실 수 있도록 하여 투약하였다. 이런 준비를 하는데 30여분에서 많게는 1시간 정도도 걸리므로 약을 먹이는데 만도 5, 6시간이 소요되고, 또 밥 대신 공급하여야 하는 유동식(流動食)을 준비하고 먹이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소변을 받아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켜 주어야 하며, 욕창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시로 몸을 뒤척여 주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수시로 변하고 통증이 밀려 올 때 마다 진통제를 먹여야 하기 때문에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런 지극 정성으로 스님의 몸 상태는 당초 병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주치의의 입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좋아졌으며 주치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하자 이 말을 들은 TV방송국이나 신문기자 등이 스님을 취재하겠다고 연락을 하기도 했다.
상태가 나빠져 입원을 하는 경우에도 직접 치료 행위 외에 간병만은 연화심 보살의 몫이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간병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간이침대에서 웅크려 자고, 병원의 열악한 조리대에서 마치 간이음식을 먹듯 대충 조리하여 허겁지겁 먹고는 또 다시 간병을 하여야 하는 환자보다 더한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것이 25년이었다.
그런 지난한 세월을 보내면서 절망의 늪에서 울기도 하였으나 환자인 스님을 위하여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하는 그동안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몸속에 들어앉은 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 따뜻한 날 마침내 육신을 멸하고 법신을 얻어 부처님의 세상으로 떠났다.
천진스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병과의 싸움에서 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당장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이기고 25년을 생존케 하였다는 사실은 의사의 말대로 기적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 승리였고,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숭고한 사랑의 승리였으며 스님을 향한 연화심 보살의 의지의 승리였다고 감히 선언하고자 한다.
“연화심 보살님,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여생일랑 당신을 위하여 쓰십시오.”
필자가 스님의 영전에서 낭송한 조시(弔詩) 한 구절을 읊으며 이 글을 마친다.
『... 불귀의 먼 길 떠나는 아들이 울부짖는 어미 가슴에 묻어 둔 것은 아미타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 참 행복한 미소였네
극락왕생의 길 떠나는 천진의 미소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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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수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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