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우리는 여행사가 모객(募客)하는 1박 2일 일정의 일몰과 일출 명소를 찾는 새해맞이 여행에 나섰다.
집사람과 집사람의 친구, 그 친구의 언니와 형부등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고 하였다.
전에 같으면 나는 당연히 같이 가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지만 고희(古稀)라고도 하고 종심(從心)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70대에 진입하는 원년 첫 새해맞이를 좀은 뜻깊게 보내고 싶은 생각에 따라나섰다. 약 4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하는데 모두들 70고개를 넘어선 할매, 할배들이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장 젊은 축에 속하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나는 들고 간 책을 읽었다. 책 읽는 틈틈이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는 하얀 눈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버스를 세웠을 때마다 차에서 내려 소복히 쌓인 눈을 밟아보는 재미는 생전 처음 눈을 본 아이들처럼 마냥 즐겁기만 했다.
중간중간 명승지를 둘러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새만금 간척지에서 바라보는 낙조(落照)는 황홀, 그 자체였다. 젊었을 때는 떠오르는 태양이 좋았지만 70 문턱을 밟고 선 지금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붉은 낙조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광경으로 다가와 더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2022년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간다. 다시 떠 오를 새해의 태양은 티도 흠도 없는 매끈함을 기대한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마지막 태양을 서해바다 뻘 속에 묻어 버린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한다.
평소 술을 멀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술을 마셔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고개를 처박고 밥만 먹는다.
한 테이블에 앉아 갑자기 식구가 된 누나뻘 아주머니가 회를 잘 먹는 나를 보고 옆 테이블에 있는 회 접시를 통째로 들고 와서 내게 갖다주고, 꽃게탕의 얼큰한 국물이 맛있다고 하면서 자꾸만 들어 주는 배려가 너무 고맙다.
푸짐한 음식에 푸짐한 마음씨까지 푸짐하게 먹은 2022년 최후의 만찬이었다.
문제는 저녁 잠자리였다.
당연히 2인 1실이라고 생각했는데 3인 정도 잘 수 있는 작은 방에 나까지 7명이 자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나보다 4, 5년 연배로서 학창 시절 부의 친구들 사이였다. 그들은 방안에 들자마자 술판을 벌일 모양새다.
다른 방으로 갈 수도 없고, 어떻게 자야 할지 고민이 시작된다. 할 수 없이 나는 구석 자리 한 켠을 선점하고 앉아 책을 편다. 책을 보는 척이라도 해야 술자리 합석의 요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술판을 벌이는 일행의 눈치를 보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올 것은 결국 오고야 만다. 먼저 자리를 잡고 술자리를 편 그들은 나를 끌어 들인다.
권유를 받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적당한 기회에 빠져 나오기로 하고. 그러나 내가 합석만 했을 뿐 대화에 끼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술을 마셔주지도 못하는 형국이니 물에 뜬 기름이고 개밥의 도토리다. 그때부터 또 다른 불편이 이어진다.
그들은 멋대로 떠들고, 서로간에 방자(?)한 언어를 썼지만 그건 친구 사이의 격의없는 정담이었을 뿐 무례함은 없어 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불편해 하는 나에게 책을 보라는 권유를 한다. 그들의 말과 표정에서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심은 그 짧은 시간에 나를 놀랍도록 변화시켰다. 내 말수가 많아진 것이다.
그들의 진심에 마음이 열려진 나는 그들의 망년(忘年) 자리를 망년(亡年)으로 만들 시건방진 농담을 시작하였고, 그들보다 내가 더 떠드는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트인 마음들이 계묘년 첫 태양보다 더 아름답게 떠올라 닫힌 내 마음을 열어 주었다.
나이 70이면 종심(從心)이라고 한다.
그들은 망년, 신년 맞이의 흥겨운 술판에서도 결코 절제와 체면을 잃지 않는 군자의 도를 보였다.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는 그들에게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를 보았다.
2023년 신년을 맞이하면서 ‘물에서는 물이 되고, 기름 항아리 속에서는 기름이 되자.’는 각오를 해 본다.
여행사에서 나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려고 호랑이들만 득시글거리는 굴에 토끼인 나를 밀어 넣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이 토끼였고, 내가 호랑이였다.
형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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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수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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