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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2/02/21 14:24:40  이한규
녹동 김기원 교수의 차시문학의 감상(13)
4 차시문학의 감상 개념

4 차시문학의 감상 개념
 


특히 천일선사의 선정 생활 속에 삼매경에 미친 영향으로 도교적인 차도의 경지와 잠재된 불교교리로 선법일미(禪法一味)로 더욱 증체시킨 선사의 학덕을 평소보다 더 높게 공경하는 뜻을 차시를 통하여 표현한 내용이며 천일선사의 일상 인품보다 훌륭한 인품을 더 높게 보아 도인으로 모시는 칭찬의 차성(茶聲)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또한 선사의 재차(製茶)의 세계를 이해하였던 추사가 차시로 답례하기까지 접근성에 미친 감정을 정확히 밝혀 두어 훌륭한 차시 감상에 응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茶란 매개의 주어(主語)로 상대의 마음 세계를 현혹 시키고 밖으로 신체 내를 감정화 시키므로 최고의 차시 내용이 곧 최고의 감정 표현을 달성시킨 것이다. 차시 감상을 일으키는 감응은 단순한 감정 폭발로 시작된다. 감정이 미친 행위까지 극치를 이룩하였다. 부유 속에 교만이 없고 격차 없는 도덕성을 갖추는데 보이지 아니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는 자가발전의 빛이 되고 차시로 변형되는 예정한 사람에 보내는 잔잔한 감정을 <파도의 칭찬>이란 용어로 바꾸어야 차시를 창작하는 애교 행위라 하겠다. 어떠한 자극보다 스스로 감정 유발로 “잘한다,“재창, 삼창의 울림이 더 많이 더 넓게 불꽃을 분출하는 활화산 같은 자가 발전이 열정으로 변하여 칭찬을 만든다.
추사는 속세를 멀리하고 산속에 파묻어 안거하는 수도승에 접근하여 차란 매개로 칭찬을 창조함으로서 거룩하게 배려가 창작되게 차시문학 제목을 유도하였다, 또 추사는 차인에 차시를 통하여 교류를 장려하여 항상 겸허하고 소박한 그림의 세계, 글짓기로 언제나 문학예술을 첨가하여 다향을 풍기게 함이 차시 그림에 멋을 첨가하였다

(5) 추사(秋史)의 명선(茗禪)을 통한 차시문학 감상
조선시대 서화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대표하는 호(號)가 추사 이외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다노(茶老), 고정실주인(古鼎室主人), 승설학인(勝雪學人) 등을 가졌다. 추사는 성문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의 벼슬를 역임하였고 실학파 선비로 서예에 독톡한 추사체란 서필체로 대성 경지를 이룩하였다. 특히 추사의 서화는 음양요행을 겸비한 주역(周易)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접목된 동양 최고의 결작을 완성한 서화가라 하겠다.
저서는 완당집(阮堂集), 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전하며 추사는 24세 아버지를 따라 중국 연경(燕京)애 다녀온 적 있어 차로 인한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승화하였다. 30세(1815)에 동갑 초의(艸衣)선사를 만나1856년 41년간 금란지교를 나눔 하면서 초의선사를 통해 차를 얻어 마시며 선(禪)을 배웠다. 추사가 55-63세에 제주도로 귀양살이 갔을 때 초의는 직접 찾아갔어. 차를 끓어 마시고 차나무를 심었고 참선을 지도하였다, 또한 추사는 하동 쌍계사 만허(晩虛) 스님이 만든 차를 얻어 마시고 그 손맛을 절묘하게 감탄하며 중국 용정(龍井), 두강(頭鋼) 차를 능가한 차맛을 격찬한 바 있었다
명선(茗禪)이란 추사가 지어 초의선사에게 준 호(號)이다. 차명자(茗)는 차를 뜻하며  참선자(禪)는 선에 들다. 즉 명선(茗禪)은 차를 마시면 선정에 들다. 즉 차와 선은 둘이 아니고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지은<초의가(艸衣歌)> 병서(倂序)에도 추사가 일지 암을 찾아가 명선을 감상한 기록이 전한다.
차시문학이 왜 명선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접근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추사는 문학예술의 경지를 넘은 달인이고 초의는 문학예술 감상에 정신세계를 이룩하는 차 달인으로 차와 선이 새로운 문학 세계를 통합하여 창작하는 논제를 차와 선이 만들어 낸 감정의 표현이 곧 차시를 창작하고 감상을 접근하는 이론이다.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구걸하면서 답례를 할 때는 실물 경제인 부채에 답례로 차시를 쓴다. 그림을 보낼 때는 그림 옆에 차시로 글을 쓰게 된 사연을 행서로 답례로 안내하였다. 조선시대 두 사람은 신분적 격차는 하늘과 땅이지만 초의선사는 추사의 글씨를 무척 좋아했고 추사는 초의선사의 차를 사랑할 만큼 글 속에 순호히 흐름은 예사로의 보이지만 그 속에 예사로운 멋이 넘치고 고귀하고 선명한 맛이 숨어 있어 명선 자체가 문학적 의미는 넓고 깊은 동일한 본체이며 차와 선은 감정 변화 일뿐 문학 속에서 명선을 통하여 논제를 얻게 되고 문학의 분류하는 격차가 있다 할지라도 문학예술과 사상 세계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얽히고 설 커진 감상이 주제적 역할로 연결되어 차시 감상과 접근 이론에 필수적이라 하겠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고요함에 대한 게송> 초의스님께 드림 시를 함께 읽고 이해합시다(원문 성락).

내 마음 고요할 땐 저자라도 산이지만 / 네 마음 들렐 때면, 산이라도 저 자리이라 /오로지 마음에서, 저자와 산 나누인다. / 물병 가고 바늘 옴에 어이이리. 분분한가. 고요함에 네 구할 때 마음하며 소란하다 /  현묘한 깨달음은 산 잊고도 구함이라 / 저자 거라 산속만 못한다고 너 말하나 / 산중마저 들렐 때는 장치 어딜 쫓아가리. 네가 저자 처해서도 산중에서 부듯하면 /  푸른 솔은 왼편에 있고 흰구름은 앞에 일어나
 
산속이나 저작거리나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따라 저작 속도 산속이고 산속도 저작이다. 육신에 처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처함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한양 한번 다녀가라 자꾸 편지를 해도 초의는 반응이 없다. 저작거리가 산속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니 도력이 여만 한가보라고 심술부리고 있다. 저작거리라도 마음에 따라 푸른 솔에 옆에 있고 흰 구름도 앞에 있는 것이다.
초의가 일지 암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니 추사는 심술이 남 모양이다 집착을 덜고 한양을 한번 다녀가라는 아름다운 우정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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