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修行)은 몸과 마음과 삶의 흐름을 닦아 청정한 본식(本識)을 회복하는 일이다. 의식이 개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자아(自我)를 만나게 된다. 그 자아는 분별의식이 만든 가아(假我), 즉 ‘가짜의 나’다. 부처님은 자아의 실상을 오온(五蘊),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설명했다. 본래의 나인 진아(眞我)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의 수행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나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다. 무아와 진아의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관계를 바르게 통찰하고 삶 속에서 회통(會通) 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인생은 한바탕 꿈과 같다. 장자(莊子)는 나비의 꿈을 예로 들어 무상한 만물의 변화가 존재의 실존상황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인생을 ‘부드러운 꿈과 격렬한 꿈 사이의 선택’이라고 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서 관점은 다르다. 장자는 자유로운 소요(逍遙)에 삶의 방점을 두었고, 에머슨은 인생의 덧없음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주목받고 있다. 인생이 비록 꿈과 같은 상태라 할지라도, 어떤 꿈을 선택할지가 운명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부평초같은 인생의 항로를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설명했다. 알기 쉽게 12단계로 설명했지만, 존재의 갈래는 저 우주의 별만큼이나 다채롭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은 어둠의 미로에서 본원(本源)의 밝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다. 본성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현상은 환영과 같을지라도, 그 순간에는 실존의 상황이다. 환영을 통해 본질이 구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자의 중심과제는 환영을 잘 선택하고 바르게 관리하는 일이다.
환영의 선택과 관리라는 점에서, 나는 수행을 인연을 닦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인연은 자신의 수행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도 하지만, 자신을 구속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수행자가 어떤 수행법의 경계에 갇히는 원인은 인연의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종교의 표현과 형식이라는 장막이 진리를 가리는 무수한 인연사를 확장해서 생성하는 것과 같다. 명상을 예로 들어보자. 명상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신령한 의식을 밝혀 일상의 삶을 도리에 맞게 사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명상 속에 접한 어떤 신비한 체험이라는 인연에 사로잡히면, 현상과 진리의 총체성을 상실하기 쉽다. 이처럼 현상과 진리를 연결하는 인연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삶도 수행도 공허하게 된다.
또 다른 중요한 예로 윤회설을 들 수 있다. 수행의 핵심 가르침은 십이연기에 있다. 우리가 생사를 반복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십이연기에 있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씀했다. 생사윤회는 생명의 순환원리에 근간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사윤회하고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가 끊임없이 생멸(生滅)의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도 끝없는 흐름 속에 있다. 마음이 평온하다고 느낄 때도, 마음은 한순간도 고요한 상태에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통해 얻은 고요함은 일시적인 감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은 또 어떠한가? 끝없는 격랑 속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현상과 진리의 양면성을 여실하게 이해하고, 현상에 근거해서 진리로 나아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 AI가 고도로 발전하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메타버스의 세계가 실현될 수 있다.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고 본질을 파악하려면, 수행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AI 시대가 수행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행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수행의 의미를 잘 모른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봐도 수행자로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수행자는 자기가 하는 특별한 수행법을 최고의 가치로 얘기하지만, 사실 수행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고 경계가 있다. 수행자의 상황과 특성에 맞게 명상, 염송(念誦), 기도, 봉사, 호흡, 관음(觀音), 관상(觀象), 포행(布行) 등 무수한 수행 방법이 동원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실상 모든 수행법을 자신의 인연 변화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과 삶이 자연의 율려작용(律呂作用)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적멸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시공간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대자유의 상태에서 우주의 율동과 함께하는 것이다. 반면에 생명의 이치를 모르고 의식상에서만 무아(無我)를 추구하면, 허무한 공무(空無)의 경계에 빠지기 쉽다. 이것은 무아가 아니라, 무기(無記)다. 마치 생명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상태다. 무아는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분별의식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엄연히 나라는 물리적 실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수행의 핵심이 무아이지만, 무아는 완전한 생명을 지향할 때 그 힘을 발휘한다. 진정한 무아는 편견과 아집이 사라진 체 대자연과 대동일체(大同一體)를 이룬 완전한 생명력을 회복한 상태를 말한다. 생기발랄한 상태이지만,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내가 무아의 나다.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자유(大自由)의 나를 이룬 것이다. 따라서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무아가 진아(眞我)라는 역설이 성립될 수 있다.
무아를 바르게 체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상이 윤회하는 이치를 바르게, 철저하게 체득할 필요가 있다. 생명은 영원한 윤회 속에 있고, 불성(佛性)은 윤회로부터 자유로울 뿐이다. 업력(業力)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윤회를 반복하는 것과 자유롭게 몸을 바꾸는 것은 천지 차이다. 불보살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중생구제에 나서는 것도 생사윤회에 근거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유로운 윤회에 있다. 진리 차원에서, 윤회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윤회가 없다고 하면, 불교의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오해를 줄 수 있다. 윤회는 생명 현상으로서 엄연히 존재한다. 윤회를 알 수 있는 수많은 과학적, 실증적 사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목적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지나치게 본질을 추구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수행자는 사회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 오히려 현상에서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대자유를 지향하는 과정을 통해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수행과학이 미래의 주요 학문이 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일반적인 학문과 달리 수행과학은 일체의 경계를 넘어서 대자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수행과학은 몸의 경계, 마음의 경계, 그리고 삶의 경계를 넘어선 진리의 세상을 끝없이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몸과 마음과 삶이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몸은 수행의 기초를 이룬다. 생리(生理)의 흐름이 균형을 잃으면, 마음과 삶도 균형을 이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몸 건강의 핵심은 인체의 청정과 균형 유지다. 이를 위해 의학, 운동 역학, 식이요법 등에 수행의 원리와 방법이 융합될 수 있다. 몸은 마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심신의 수행이 일상화될 때 인류문명은 고도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수행과학을 통해 몸과 의식이 통합되고 더불어 삶이 조화를 이루는 길이 열리면, 인류의 삶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바세계가 양극단이 상대하며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자유는 물질적 구속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인류문명의 발전은 끝없는 물질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과학은 물질의 한계 영역이라고 하는 양자물리학에 이르고 있다. 물질의 한계점을 뚫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의식을 해방해야 한다.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현상의 세계는 의식상승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바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멀지 않았다.
부처님은 우주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로 구분했지만, 실상 우리가 사는 곳에 세 개의 세상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욕계의 경계에 있게 된다. 자신을 옥죄는 욕망은 없으나, 물질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색계에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욕망과 물질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미세한 심신(心神)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무색계에 있는 상태와 같다.
현상과 진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수행자는 중도(中道)의 방법으로 현상과 진리를 통섭할 때,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 현상과 진리를 연결하는 중도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현상의 중도와 진리의 중도는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불일(不一)이자 불이(不二)의 역설적 상황을 이해할 때, 수행의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다. 특히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하는 물리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양극적 상황은 우리의 한계이자 진리로 안내하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이 칼럼은 생활불교 차원의 수행을 중심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수행은 유불도(儒佛道)가 공통으로 중시하는 핵심가치다. 단지 종교마다 표현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나는 수행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예수도 진리의 수행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현묘지도(玄妙之道)인 풍류도(風流道)에서 유불도와 기독교를 통합하는 이치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AI 시대가 본격화되면, 모든 종교가 수행의 종교로 환골탈태할 수밖에 없다. 신문명시대 종교는 진리로 하나가 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의 정신이 없고, 독선적인 표현과 믿음만을 강조하는 종교는 AI 시대에 살아남기 힘들다. 표현의 다양성 속에서 진리라는 통일성의 유지가 신문명시대 종교의 흐름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변화에 적응하는 방향이 연기법을 따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현상과 진리의 양면에서, 종교의 차이와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면과 양극의 통섭이 신문명의 열쇠다.
*수행문화, 인간교육 특강/컨설팅 문의(eastosuh@daum.net)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