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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5/12/29 14:35:32  김종열
주간불교신문 2026년 신년호 특집
적토마(赤兎馬)의 해, 불타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지혜의 얼음'을 조각하다

병오년은 붉은 말, 즉 적토마의 해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하늘과 땅이 모두 불(Fire)… 
폭주하는 이 거대한 에너지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1246년의 고려는 전란의 불길 속에서 침묵으로 '대장경'을 새겼고, 
1966년의 대륙은 광기로 문명을 태웠다 
추사 김정희와 간송 전형필, 그리고 한나 아렌트… 
가슴 속 용암을 예술과 성찰로 식혀낸 '마음의 연금술사들' 
싯달타의 애마 '칸타카'처럼, 욕망의 전장이 아닌 깨달음의 성벽을 넘는 위대한 질주를 준비하라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붉은 먼지 구름이 피어오른다. 서기 2026년, 불기 2570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기수(旗手)가 당도했다. 다가오는 새해는 병오년(丙午年)이다.

 이 해의 기운은 실로 강렬하다. 천간의 병(丙)은 한낮의 태양이요, 지지의 오(午)는 대지를 박차는 말(馬)이자 타오르는 촛불이다. 하늘과 땅이 온통 붉은 불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를 형상화하면 하루에 천 리를 내달린다는 전설의 명마, '적토마(赤兎馬)'가 된다.

 동양학에서는 이를 두고 불이 불을 만난 '비견(比肩)'의 해라 부른다. 그림자조차 허락하지 않는 정오의 태양처럼, 병오년은 세상의 모든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감춰둔 모순은 폭발하고, 억눌린 욕망은 거침없이 분출한다. 지금 우리는 AI(인공지능)라는 초고속 엔진과 기후 위기라는 지구의 발열, 그리고 이념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길 속에 서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2026년은 삼독(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길이 치솟는 위태로운 '화택(火宅·불난 집)'이 될 수도, 혹은 그 불을 지혜의 용광로 삼아 문명을 제련하는 '대광명(大光明)의 해'가 될 수도 있는, 운명의 갈림길이다.

◇ 불은 태우거나, 혹은 비추거나… 역사가 증언하는 두 가지 불

 역사의 시계를 60년 주기로 돌려보면, 그 갈림길에서 인류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Fire)은 본래 선악이 없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일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780년 전인 1246년 병오년, 고려의 산하(山河)는 몽골 기병이 지른 전란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이 쓰러지던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선조들은 칼을 들어 맞서는 대신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들은 가장 뜨거운 불길 속에서, 가장 차가운 침묵을 택했다. 전국 각지에서 나무를 베고, 소금물에 삭히고, 그 위에 한 자 한 자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고려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판각 불사가 절정에 달했던 때가 바로 1246년이다. 장인들은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세 번 절을 올렸다(일자삼배). 그들에게 판각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내면의 공포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전란의 업화(業火)를 끄겠다는 간절한 기도였다. 고려인들은 병오년의 뜨거운 열기를 남을 죽이는 살기(殺氣)가 아니라, 천 년을 이어갈 지혜를 창조하는 '신심(信心)의 불'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불이 '지혜'라는 고삐를 잃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60년 전의 역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1966년 병오년, 중국 대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의 화마에 휩싸였다. 

 "낡은 것을 타파한다"는 명분은 병오년의 혁신적인 기운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홍위병들의 가슴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수천 년 된 사찰을 불태우고, 불상을 부수고, 스승과 부모를 고발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문명의 화형식이었다. 

 병오년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성찰 없이 분출되었을 때, 그것은 세상을 정화하는 빛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잿더미로 만드는 '파괴의 불'이 됨을 우리는 목격했다.

◇ 추사와 간송, 가슴 속 용암을 '예술'과 '수호'로 식히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자신만의 등불을 지킨 이들이 있다. 병오년의 기운을 타고난 위인들의 삶은, 이 거대한 불의 해를 건너는 구체적인 항해법을 제시한다.

추사 김정희

 1786년 병오생 추사 김정희를 떠올려보자. 젊은 날의 그는 병오년의 태양처럼 날카롭고 오만했다. 그러나 55세에 닥친 제주도 유배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좁은 가시 울타리(위리안치)에 갇힌 천재. 억울함과 분노가 화병(火病)이 되어 매일같이 속을 뒤집어 놓지 않았을까. 

 하지만 추사는 그 뜨거운 용암을 벼루 위로 가져갔다. 그는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끓어오르는 화(火)를 먹(墨)의 차분함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붓끝의 절제로 눌러 담는 처절한 수행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국보 '세한도(歲寒圖)'다.

 가장 춥고 외로운 시절에 그려졌지만, 그 안에는 어떤 불보다 뜨거운 예술혼과 어떤 얼음보다 차가운 이성이 공존한다. 그는 차(茶)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고, 끝내 "차와 선은 하나(다선일미)"라는 경지에 도달했다. 추사는 불교를 통해 마음의 불을 끄고, 예술을 통해 지혜의 빛을 켰다.

간송 전형필

 추사가 태어난 지 120년 뒤, 1906년 병오년에 태어난 간송 전형필 역시 '불의 에너지'를 남다르게 썼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태웠다. 기와집 수십 채 값을 주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내고, 고려청자를 사들였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알았다. 

 돈이라는 '욕망의 불'을 태워야만 '민족의 혼'이라는 영원한 불꽃을 살릴 수 있음을. 간송에게 병오년의 열정은 사리사욕이 아닌, 공동체의 기억을 지키는 '보살행(菩薩行)'이었다.

한나 아렌트

 같은 해(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광란의 속도전 속에서 '멈춤'을 이야기했다. 나치즘의 광기를 목격한 그녀는 "멈춰서 생각하지(Thinking) 않는 것"이야말로 죄악이라 일갈했다. 

 시스템의 속도에 맞춰 기계적으로 달리는 것,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악(Evil)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AI가 생각조차 대신해 주는 2026년, 아렌트의 경고는 차가운 죽비소리처럼 우리의 정신을 깨운다.

◇ 칸타카의 고삐를 쥐고, 욕망의 성벽을 넘어라

 불교 경전에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말이 등장한다. 싯달타 태자의 애마, '칸타카(Kanthaka)'다. 2,600여 년 전, 태자가 부귀영화가 보장된 카필라성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했을 때, 그를 태우고 한밤중에 성벽을 넘은 것은 칸타카였다. 

 당시의 말은 전쟁의 도구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말을 타고 영토를 정복하고, 더 빨리 재물을 얻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칸타카는 주인을 태우고 '소유'의 세계에서 '무소유'의 세계로, '지배'의 자리에서 '해탈'의 자리로 달렸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위대한 포기'이자 '거룩한 질주'다.

 2026년 병오년, 우리 앞에는 '적토마'라는 거대하고 빠른 말이 서 있다. 이 말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기수인 우리의 마음(Mind)에 따라, 이 말은 우리를 탐욕의 불구덩이로 데려갈 수도, 지혜의 피안(彼岸)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남을 이기기 위한 속도전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나의 편안함을 위해 지구를 태우고 있지는 않은가?

 올 한 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엔진이 아니라 더 단단한 브레이크, 그리고 명확한 내비게이션이다. 1246년의 고려인들이 전란 속에서 침묵으로 경전을 새겼듯, 추사가 고독 속에서 먹을 갈았듯, 우리도 마음속 야생마의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한다. 넘치는 에너지를 혐오와 갈등의 연료로 낭비하지 말자. 대신 그 뜨거움으로 소외된 이웃의 언 손을 녹이고, 차가운 이성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자.

 "불은 태울 수도 있고, 비출 수도 있다." 2026년 병오년이 '화택'을 태우는 재앙의 해가 아니라, 무명(無明)을 밝히는 지혜의 해가 되기를 서원한다. 적토마의 등에 '반야(般若)'를 싣고 달리는 불자들의 힘찬 말발굽 소리가, 이 혼탁한 세상의 새벽을 깨우기를 기대한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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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견 (총 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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