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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6/08/20 16:15:54  이한규
배길몽 작가의 상식 뒤집기(57)
57. 팔정도와 중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불교의 기본 목적은 해탈이다. 그런데 해탈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해탈하려면 경전을 공부하거나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수천 년간 해왔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해탈을 하기 전에 먼저 올바른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팔정도를 행하려면 문제가 발생한다. 팔정도가 8개의 올바른 길이라고 원론적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팔정도의 첫째 항목이 정견이고, 정견은 올바르게 본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는 것이 올바르게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정이나 설명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보는 것이 올바르게 보는 것이며 또 그것이 올바르다고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가?

 

팔정도 실천의 문제점을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돈을 주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에게 구걸을 하지 말고 열심히 일을 하라고 훈계를 하는 것이 옳은가?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 길인지 결정하기가 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정도를 행하라는 말은 매우 공허한 가르침이 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정치에서 진보가 옳은가? 보수가 옳은가? 정답이 있는가? 정답을 알 수 없으니 진보와 보수를 번갈아 지지하면서 나라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도모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중도적 발상이다. 좌우 극단이 아니라 좌우를 번갈아 지원하면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결국 중도를 취하는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말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 좋은 줄은 모두 알지만 생쥐 중에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으므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이 되어 버린다.

 

또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재판에서 판사는 원고 아니면 피고가 둘 중에 하나가 옳다는 극단적인 판결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입장이 곤란할 때가 매우 많다. 원고와 피고 모두 잘못이 섞여 있는데 법은 승소 아니면 패소라는 극단적인 판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낸 방법이 화해나 조정이다. 적정한 선에서 서로 양보해서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도다. 극단을 취하기 어려우니 중도를 취하는 것이다. 중도는 극단에 머물지 않으면서 서로가 상생하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불교가 주장하는 자비와 같다. 자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극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사이좋게 나눔으로써 함께 상생하는 중도를 취하는 것이다. 중도는 모두가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자비의 정신을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원칙론에 불과한 팔정도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 방법인 중도를 취해야 한다.

 

필자가 탐구하고 깨달은 바에 의하면 우주에는 옳고 그름의 구분은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도 올바름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유리한 것일 뿐이다. 지도자가 현자라면 독재가 더 국민에게 유리할 수 있다. 우주는 신의 뜻이나 올바름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무아의 상태에서 상호 작용하는 연기에 의해서 작동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변화에 에너지가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에너지는 기독교의 신과 같은 존재다. 모든 일에 에너지가 간섭을 하고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너지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존재하려면 그 부피가 있어야 한다. 부피는 없는데 존재한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부피나 형태도 없는데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바로 종교인들이 믿는 신(자아 포함)과 과학자들이 믿는 에너지다.

 

에너지가 없다면 무엇이 작동해서 우주를 변화시키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 의문의 답이 바로 불교가 주장하는 연기 법칙이고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정확하게 표현하면 상호작용의 법칙)이다. 그리고 상호작용의 법칙에는 에너지의 개입은 없고 오직 힘만 작용한다. 두 물체 혹은 여러 물체가 충돌 혹은 접촉하면 상대에게 힘을 작용하고 그러면 속도나 상태가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아니라 힘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다. 그리고 에너지가 존재한다면 만유인력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유인력 공식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들어있지 않으므로 만유인력은 시간과 상관없이 무한대의 시간동안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유인력을 발생시키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가 소모돼야하고 그러면 만유인력이 무한대의 시간 동안 발생할 수 없게 된다. 중력(만유인력)은 에너지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물체의 운동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시간과 상관없이 작용할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에너지는 분자의 운동에 불과하며 입자들이 충돌해서 연기 작용을 하면 입자의 운동량이 변할 뿐인데 과학자들은 그것을 에너지의 이동이라고 오해한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에서 물질이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입자가 핵에서 이탈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분자들의 운동량이 증가하면 마치 에너지가 새로 생성된 것으로 착각한다. 물질이 변해서 에너지가 되거나 반대로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없는 이유를 필자가 지난 번 연재에서 양자 이론을 이용해서 설명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우주는 태초부터 존재하던 입자들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서로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에너지는 물론 입자들도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나 종말은 있을 수가 없고 오직 변화와 순환이 지속되는 무시무종의 윤회만 있게 된다.

 

종교의 목적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인데, 어떤 종교는 오히려 세상을 더욱 어지럽히면서 무질서와 고통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종교만이 옳으며 나머지 종교는 거짓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 종교에 대한 불신은 물론 테러와 전쟁도 불사한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전쟁종교로 인해서 발생했다. 심지어 수백만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일도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교가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세상을 혹세무민하는 것도 모자라서 정치에 개입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는 기득권 종교를 개혁하려고 탄생했다. 그래서 기득권을 타파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대중의 큰 호응을 받으면서 두 종교는 크게 성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두 종교가 오히려 기득권이 되어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주에는 오직 주변에 있는 존재들에 의한 연기 작용(상호 작용)만이 존재하고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올바름이라고 주장하는 팔정도는 사실상 실천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중도라는 것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중도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말고 중간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당장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좋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화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사주에게만 유리하거나 사원들에게만 유리한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사원에게만 유리하면 처음에는 사원에게 좋지만 결국 회사가 망할 것이고 그러면 사원에게도 손해가 발생한다. 그러니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중도가 필요하며 이것이 불교에서 권장하는 자비이고, 유교가 추구하는 중용이며 기독교가 외치는 사랑이다.


▲배길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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