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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5/12/29 14:56:13  김종열
불기2570년 병오년 신년 기획
닫힌 산문(山門)을 열고, ‘마을’이 된 절


인구 절벽의 시대, ‘관계의 복원’으로 지방 소멸에 맞서는 불교의 조용한 혁명
부산 혜원정사, 30년 지속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역 사회 안전망의 표준 제시
구례 화엄사, 권위 내려놓고 대중과 호흡… 120억 경제 효과로 지역 소생 견인
남원 실상사, 귀농 학교와 협동조합으로 ‘인드라망 공동체’ 구현… 인구 유입 기적

위기의 지도와 불교의 지도

2024년 행정안전부 고시 인구 소멸 지역

 2024년, 대한민국 정부는 국토의 지도 위에 붉은색 잉크로 경고등을 켰다. 행정안전부가 고시한 ‘인구감소지역’ 명단에는 부산 동구·서구·영도구 같은 광역시 도심부터 가평·연천 등 접경지까지 총 89개 시·군·구가 이름을 올렸다. 이번 신년 기획의 주요 취재 현장인 전북 남원시와 전남 구례군 역시 이 89개의 붉은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이 차가운 행정 데이터가 가리키는 결말은 명확하다. 바로 ‘소멸’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긴 골목엔 빈집이 늘어가고, 마을을 지키던 노인들이 떠난 자리에는 적막만이 감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지도를 불교계의 지도와 겹쳐보면 섬뜩하고도 필연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지난 1,700년간 한국 정신문화의 핏줄 역할을 해온 산중 사찰의 위치와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이 정밀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을이 사라지면 시주가 끊기고, 절을 찾는 발길도 멈춘다. 중생이 사라진 곳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홀로 고고하게 머물 수는 없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이제 ‘속세와 떠난 산중’이라는 낭만적인 수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절박한 위기 앞에서 빗장을 활짝 열어젖히고 스스로 ‘마을’이 되기를 자처하며 소멸에 맞서는 사찰들이 있다. 주간불교는 2026년 새해를 맞아 위기를 ‘공동체 회복’으로 돌파하며, 텅 빈 지역 사회에 다시 사람의 온기를 채워 넣고 있는 현장을 심층 취재했다.

헤원정사 경로잔치에서 어르신들에게 음성공양을 하는 어린이 합창단

부산 혜원정사: 도심 속 ‘자비의 요새’가 되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 화려한 빌딩 숲과 낡은 주택가가 공존하는 도심 한복판의 혜원정사는 주민들에게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다. 이곳은 일종의 ‘사회적 요새’와 같다. 지난 30년간 혜원정사는 사찰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 역할의 모범답안을 묵묵히 써 내려왔다. 주지 원허 스님(불교신문 사장)은 “사찰이 곧 복지관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95년 사회복지법인 혜원을 설립했다.

 가장 상징적인 활동은 1999년 주지 원허 스님 취임 직후 시작된 저소득층 청소년 학습 지원 및 장학 사업이다. IMF 외환위기 직후, 부모의 실직으로 끼니를 거르고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에게 사찰은 기꺼이 문을 열었다.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주고, 배우고 싶은 아이에게 펜을 쥐여준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자비행이었다. 지난 26년간 이곳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수많은 청소년은 일명 ‘혜원 키즈’라 불리며, 교사와 공무원 등 건실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다시 사찰을 찾아 후배들을 후원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

 노인 복지 또한 핵심축이다. 1993년 시작된 ‘혜원 경로잔치’는 2025년 32회째를 맞았다. 매년 지역 어르신 1,500여 명을 위로하는 이 행사는 지역 사회의 연례 축제로 자리 잡았다. 어린이집부터 청소년 아카데미, 노인 요양 보호에 이르기까지 ‘생애 주기별 돌봄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국가 복지의 사각지대를 불교적 자비행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사상이 구체적인 사회 안전망으로 구현된 사례다.

화엄사 홍매화 축제에 동참한 불자와 시민들

구례 화엄사: ‘힙(Hip)’한 파격으로 지역 경제의 심장이 되다

 인구감소 지역인 전남 구례군에 위치한 천년고찰 화엄사의 변신은 더욱 파격적이다. 화엄사는 고유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심장’ 역할을 자처했다. 변화의 시작은 ‘하심(下心)’이었다. 화엄사는 국보 각황전 앞 홍매화를 보려는 사진가들을 위해 산문 개방 시간을 기존 오전 7시에서 오전 5시 30분으로 대폭 앞당겼다. 수행 환경 침해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니즈(Needs)를 존중하고 다가서려는 결단이었다.

 이러한 개방성은 다양한 문화 기획으로 이어졌다. 2024년 제4회 홍매화 사진 콘테스트는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섰고, MZ세대들은 앞다퉈 SNS에 화엄사를 공유했다. 엄숙한 사찰 마당에서 즐기는 ‘모기장 영화 음악회’,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요가 대축제’는 “절은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성과는 숫자로 증명된다. 구례군의 분석에 따르면, 화엄사 축제 기간 방문객의 소비와 숙박 등 경제적 파급 효과는 약 120억 원에 달했다. 축제 기간 구례 읍내 식당과 카페는 재료가 소진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화엄사 모델은 사찰의 문화유산이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구 소멸 시대에 지역을 먹여 살리는 강력한 ‘문화·경제적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전통을 지키되 현대와 소통하는 ‘중도(中道)의 지혜’가 빚어낸 쾌거다.

남원 실상사 마을공동체 협동 작업장

남원 실상사: 마을이 곧 부처의 뜰, ‘인드라망’의 기적

 전북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의 실험은 사찰이 마을 공동체의 ‘뿌리’가 되어 생태계를 복원한 가장 근본적인 모델이다. 실상사는 1990년대 후반, 귀농 인구가 늘어날 것을 예견하고 1998년 국내 사찰 최초로 ‘귀농학교’를 설립했다. 도시 생활에 지쳐 막막한 이들에게 사찰은 땅과 농사법, 그리고 ‘함께 사는 법’을 일깨워주었다.

 젊은 귀농인들의 자녀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를 개교한 것 또한 결정적이었다. 사찰이 공교육의 한계를 보완하고 마을의 미래 세대를 길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한생명’, ‘산내면 마을신문’, 협동조합 등 다양한 공동체 조직으로 분화되었다. 실상사 도법 스님을 필두로 사찰 소유 토지를 유기농 경작지로 전환하고 직거래 장터를 열어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그 결과 산내면은 2024년 기준 전체 인구의 약 20%가 귀농·귀촌 인구일 만큼 활기찬 마을이 되었다.

 실상사 모델은 “온 우주가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경의 ‘인드라망(Indra's Net)’ 세계관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다. 이곳에서 절과 마을은 둘이 아니다. 마을이 곧 수행처요, 밭을 가는 것이 곧 참선이다. 실상사는 사찰이 수동적 공간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살려내는 ‘마을 큐레이터’이자 ‘공동체 디자이너’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사찰

 전문가들은 불교계와 사회가 사찰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언한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의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사찰 일구기> 보고서는 “지역 사회 소멸은 곧 사찰의 존립 위기”라며 사찰의 공익적 활동을 강조했다. 전국 3,000여 개 사찰은 이미 훌륭한 커뮤니티 공간과 신뢰를 갖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일본은 빈집 문제 해결을 위해 사찰이 유휴 공간을 ‘테라 워크(공유 오피스)’ 등으로 개방해 마을 재생 거점이 되고 있다.

 한국 불교 역시 ‘산중 불교’라는 낡은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 또한 사찰을 단순 종교 시설이 아닌, 고립 청년 치유와 노인 돌봄 등 공공 서비스를 수행하는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 사찰 운영 마을 카페나 도서관 등에 대한 세제 혜택 등 제도적 뒷받침도 필수적이다.

 소멸은 단절에서 온다. 그러나 연결하면 살아난다. 십우도(十牛道)의 마지막 단계는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 저잣거리로 내려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廛垂手)’다. 2026년 새해, 닫힌 산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온 부처님들이 소멸해가는 지방 도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확장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이자, 파편화된 현대 사회가 회복해야 할 공동체의 ‘오래된 미래’다.

특별취재팀=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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