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통한 내면성숙과정 감동
“아직도 보살초 그리세요?”
“앞으로 열흘은 더 그려야
삼천 장 채우신다고 그러네.”
소설가 한강의 〈아기부처〉를 보고 있노라면 생의 비의를 이미 다 알아버린 듯한 무애한 고독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 고독은 생을 향한 막연한 우수, 자기기만이 동반된 어설픈 감상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고독은 영롱하며 치열한 내적 투쟁의 산물이다.
작가는 주인공 선희를 통해 고독의 인(因)에 해당하는 ‘상처’를 직시케 함으로써 고독을 더욱 심화시키고 종국에는 온갖 형태의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이 일련의 과정은 종교적 구도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 벌어진 틈새에 따스한 혀를 밀어 넣어 애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움트듯, 아귀들이 바글대는 폐부를 풀무질하듯,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 절대고독 속에서도 자유를 얻겠다는 결의는 인간성이 지닌 가장 숭고한 미덕이라 할 것이다.
소설 〈아기부처〉는 이렇듯 인간성의 승리를 통해 “인간은 결국 고독한 존재이며, 생은 곧 고통이다”는 1차원적인 회의에서 “고통의 실체를 성찰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는 불교적 해탈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주인공 선희는 프리랜서 동화일러스트작가이다. 그녀의 남편은 완벽한 외모와 실력으로 주목받는 뉴스앵커이다. 하지만 선희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의 지나친 결벽주의와 육체에 대한 혐오 때문에 선희는 무기력하고 냉담한 나날 속에 마음의 상처를 키워간다.
남편에게는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하나 있다. 그의 몸은 어린시절 화상의 흔적으로 볼품 없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새 여자가 생긴다.
이 무렵 선희는 자주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선희는 아기부처를 보기 위해 어딘가로 늘 향하지만 결국은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이상한 몰골의, 더군다나 날카로운 적의를 품은 진흙인형을 맞닥뜨리게된다. 그 형상은 만지면 만질수록 더욱 악마적인 몰골로 변해가며 선희를 노려본다.
선희의 어머니는 풍을 맞고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한 다음부터는 불가해한 열정으로 불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그녀는 ‘한평생 칼을 품고 살았던’ 자신의 지난날을 불화를 그리며 정화하고 있었다. 선희는 어머니의 변모를 지켜보며 어머니를 빼 닮은 자신 역시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남편은 결국 여자와 헤어지고 술에 절은 채 집에 돌아온다. 남편의 몸을 본 여자가 결국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선희는 분노와 슬픔에 오열하는 남편을 간호하며 완벽주의로 무장한 남편의 외피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그 안에 내재된 상처가 얼마나 생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선희의 꿈속에는 더 이상 아기부처가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 ‘아기부처’의 서사는 명료하다. 남편의 결벽성·외도 등으로 인한 결혼생활의 회의, 그 결과 남편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및 살의를 느끼고 나아가 자기연민에 허우적대다 결국은 남편과 자신을 용서하고 생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기부처〉의 플롯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기부처〉의 플롯은 꿈을 통해 무의식까지 포용해 매우 다층적이고 광대하다. 이는 인간 내면의 살풍경한 구석 곳곳까지 현미경을 들이댈 수 있는 작가의 역량과도 직결되리라.
주인공 선희는 애초부터 남편 상협을 사랑하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상협이 연애시절 자신의 화상자국을 선희에게 보여주면서 시작된 것이다. 선희는 매사에 좋고 싫음이 분명하지 않은 성격이다. 하지만 이는 우유부단하기보다는 속내가 깊고 정이 많은 성품 때문이다. 이런 여린 성품이 사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의도적으로 잔정을 주지 않고 키울 정도다.
한마디로 이런 그녀에게 남편의 결벽성은 일종의 폭력에 가깝다. 남편은 헌신적인 선희의 태도를 아내로서의 자연스러운 덕목쯤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감기에 걸린 아내 앞에서도 자신에게 감기가 옮겨 붙을까 염려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다. 선희에게 남편은 생을 향유하는 다른 방식의 모럴을 가진 존재이고 나아가 선희의 자존을 위협하는 괴물인 것이다.
선희의 꿈속에 등장하는 아기부처의 상징은 바로 인간 내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어두운 존재, 악마적인 자아를 반영한다. 그런데 선희는 왜 굳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진흙인형을 아기부처로 생각했던 것일까. 이는 선희가 지향하는 성(聖)을 상징한다. 아기부처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선과 악, 성과 속을 동시에 내포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선희의 무의식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화했던 근거는 바로 남편을 향한 원망이 투영된 것이자, 현실을 제대로 관(觀)하지 못한 선희의 어두운 자아를 상징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선희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우칠 수 없었던 것은 불화를 그리는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그 스님이 그러더라. 관세음보살은 내 속에 있다고. 내 몸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득해지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이라더라.”
다섯 장 째 관음초를 베끼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날 따라 말씀을 제법 많이 하고 있었다.
후회가 된다… 다 후회가 돼.
이틀만에 의식을 되찾았던 재작년 가을, 입원실 침대맡에 모여 앉은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뭐가요 어머니, 하고 오빠가 거푸 물었으나 어머니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아버렸었다.
어머니가 후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삼천 장씩 불화를 베끼는 것으로 무슨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는 걸까.
불화는 예술적 승화를 통해 관념의 때를 지워 가는 구도와 흡사하다. 여기에 또, 어머니는 선희를 향해 적극적으로 화해를 구한다. 이로써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와 앙금들은 자연스레 순화되고, 홀몸으로 자녀들을 키워냈던 어머니의 고충과 두려움 등을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는 곧 선희가 세상과 자아를 투명하게 사유하고 관조할 수 있도록 인도한 스승이자, 어머니가 그리고 있는 관음초 속 관세음보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작가 인터뷰- 소설가 한강
“화계사 드나들며 젊은날 위무”
“소설 〈아기부처〉는 상당히 불교적인 소설입니다. 여주인공이 현실을 긍정하고 순화하는 과정이 바로 불교적 구도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어머니는 중요한 선례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머니가 불화를 통해 재생하는 과정을 통해 선희 역시 관조의 미학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죠.”
소설가 한강은 단아한 외모만큼이나 깔끔하고 격조있는 문체로 젊은 작가군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평가된다.
그와 불교의 인연은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살 무렵으로 기억하는 당시, 그는 가족을 따라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연등회를 구경하러 갔고, 화려하고 장엄한 연등회 전경이 너무 아름다워 충격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한 건 1998년 28살 무렵부터이다. 당시 그는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집 근처인 서울 수유동 화계사를 드나들며 간신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자극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소재로 무모한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과 비교할 때, 소설가 한강은 믿음직스러운 보물처럼 여겨진다. 생의 비의를 좇아 인간의 실존을 가슴으로 사유하는 그의 문체는 따스하다 못해 손이 델 정도로 뜨겁다. 아픔을 아픔으로, 환희를 환희로 올곧게 묘사할 줄 아는 그녀의 리얼리즘이 인간성의 구석구석을 더욱 찬란하게 비출 수 있길 염원한다.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871호 11.5
■ 작가이력
한강
1970년 11월 27일 광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붉은 닻〉 당선
1999년 〈아기부처〉로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05년 〈몽고반점〉으로 제29회 이상문학상 수상
http://www.bulgyonews.co.kr/news/9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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