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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0/06/23 16:09:22  이한규
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 강좌(15)
1) 부정관(不淨觀) : 離貪의 인간형성

아비달마구사론은 수행의 차제(次第)를 문(), (), ()의 수행으로 진리를 보는 법(見諦; 사성제를 보는 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르침에 대해 섭수하여 듣고[聞所成慧], 이어서 지금까지 들은 진리를 보는 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그리고는 전도(顚倒)되지 않은 사유(思惟)를 하고[思所成慧], 사유를 한 다음에는 바야흐로 선정[]을 닦아 익힌다는 것[修所成慧]이다.

 

그런 다음에 아비달마구사론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신기청정(身器淸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신기청정의 첫 번째는 신심원리(身心遠離)이다. 이것은 몸으로 잡된 세속의 물든 상태에서 떠나고, 마음으로 선()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희족소욕(喜足少欲)’으로서 큰 욕심이 없어서 기쁘게 만족하지 않음이 없는 것[無不喜足]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얻은 빼어나게 예쁜 옷들이 있는데도 다시 많이 구하게 되는데, 이것은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不喜足]’이고, 빼어나게 예쁜 옷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 옷들을 얻기를 많이 바라게 되는데, 이것은 큰 욕심[大欲]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 옷들을 구하는 까닭은 욕계에 결박되어 있고, 욕탐(欲貪)을 특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희족소욕의 바탕인 무탐(無貪)으로서 대치(對治)를 삼아 성인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4성종(四聖種)이다. 4성종(四聖種)은 탐욕이 없는 희족소욕을 바탕으로 모든 불제자들이 세속의 생활도구[生具]와 세속의 사업[俗事業]을 버림으로써 해탈을 구하기 위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세속의 도구가 아니라 도를 이루기를 도와주는 생활도구[助道生具]와 도를 이루기 위해 도와주는 사업[助道事業]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전자인 조도생구에 의지해서 후자인 조도사업을 일으킨다면 오래되지 않아 해탈을 한다고 또한 말씀하시는 것이다.[世親 造, 玄奘譯, T29.阿毘達磨俱舍論, 分別賢聖品, p.1558. 0117a02. 인용]

 

남방 테라바다 불교의 교설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청정도론에서는 계청정에서 계에 대한 정의와 계의 목적과 의도,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의 내용 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비달마구사론은 비교적 계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신기청정(身器淸淨)’이 짧막한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신기청정은 후대 천태학의 문헌 등 대승불교의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용어의 계보를 알 수 있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신기청정에 이어서 비로소 3현의 수행법이 전개된다. 5정심(五停心)이 그 첫 번째로 이것에는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계차별관(界差別觀) ·수식관(數息觀) 등이 있다. 여기서는 핵심수행인 부정관과 수식관을 살펴보도록 한다. ()과 심(; vitarka, 대상을 향한 마음의 동요)이 증가하는 상태가 맹렬하고 치성하여 자주 앞에 나타나는 유정들에게 부정관을 닦는 것이 필요하고, 마음의 동요로 많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지식념(持息念)이 필요하다. 달리 표현하면, 과도하게 많은 탐욕[]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부정관이 필요하지만 대상을 향한 마음의 동요가 심한 사람에게는 입출식념(入出息念)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부정관은 네 가지 탐()이 있어서 하는 것인데, 즉 청(((() ()에 대해 탐하는 현색탐(顯色貪), 형상이나 모습에 대해 탐하는 형색탐(形色貪), 감촉을 탐하는 묘촉탐(妙觸貪), 그리고 지위나 명예 등에 대해 탐하는 공봉탐(供奉貪) 등이 그것이다.

 

첫 번째, 현색탐에 대한 대치(對治)로서 하는 부정관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생전의 아름답거나 건강한 모습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대한 대치(對治)로서 죽은 사람의 시체가 푸르게 변한 모양(푸른 색의 어혈같은 모양)등을 소연(所緣)으로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 "緣青瘀等修不淨觀治第一貪"]

 

두 번째, 형색탐에 대한 대치(對治)로서 하는 부정관은 사람의 형체가 영원한 것 같지만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체가 짐승들에게 잡아먹혀 흩어지게 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을 所緣으로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緣彼食等修不淨觀治第二貪"]

 

세 번째, 묘촉탐에 대한 대치(對治)로서 하는 부정관은 벌레와 구더기가 들끓어서 살에 진물이 나고 부패하여 뼈만 남게 되는 모습을 所緣으로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 [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緣蟲蛆等修不淨觀治第三貪"]

 

네 번째, 공봉탐에 대한 대치(對治)로서 하는 부정관은 움직임이라고는 없는 해골을 所緣으로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 [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緣屍不動修不淨觀治第四貪"]

이와 같이 네 가지 탐욕[]을 소멸시키는 부정관을 닦는 사람은 뼈를 관하게 되는데,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처럼 자신의 몸에 대하여 나의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나냐틸로카 엮음,붓다의 말씀, 고요한 소리, 2007. p.148에서 인용]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닦는 수행은 골쇄관(骨鎖觀)이라고 하며, 골쇄관 수행을 통해 네 가지 탐욕을 대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골쇄관에 의한 대치로 승해(勝解;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예리한 이해, adhimokṣa)가 이루어지며, 이러한 승해는 확대된다. 즉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 즉 발가락[足指]이나, 이마, 또는 다른 부분[그가 좋아하는 곳]에 마음을 두고 승해의 힘으로 신체의 일부분에 대하여 가상(假想)으로 사유를 한다. 피부와 살점이 떨어져나가 점차적으로 뼈만 하얗게 남는다고. 그리고 내지 온몸이 뼈의 사슬로 되어 있다고 관()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넓게는 방(), 사찰[], 동산, 마을, 나라에 이르기까지, 내지는 바다가 경계가 되는 땅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뼈 사슬이 가득 차 있다고 관()한다.[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 "如是漸次廣至一房一寺一園一村一國乃至遍地以海為邊於其中間骨鎖充滿"] 그리고 마음을 축소[縮約]해서 하나의 뼈 사슬을 승해(勝解)하는 것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이 초심자의 유가행자(瑜伽行者)가 닦는 골쇄관의 관법(觀法)으로 초습업(初習業)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다음 유가행자가 닦는 관법은 숙련자의 관법[熟修라고 ]으로서 발의 뼈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두개골의 반쪽을 제외한 나머지 반쪽에 마음이 향하게 하는 데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그 다음 닦는 골쇄관의 관법(觀法)은 양미간(兩眉間)에 마음을 집중하여 담연(澹然)하게 머무는 것인데, 이것은 초작의(超作意)라고 일컬어진다. 여기까지가 부정관의 수행과정이다.

 

부정관은 탐욕이 있는 사람을 탐욕이 없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무탐(無貪)을 자성(自性)으로 한다. 그리고 부정관은 4정려(四靜慮)와 근분정(近分定), 중간에 있는 선정[]과 욕계 등 십지(十地)에 속한다고 하며, 욕계에 계박(繫縛)되어보여지는 것, 즉 청(((() 으로 나타나는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을 대상[所緣]으로 한다. 그리고 오직 사람 가운데[人趣]에서 이것이 생한다. , 북구로주(北俱盧洲)는 제외한다.

 

부정관 수행은 부처님 재세시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입멸후에도 출가 수행승들이 통과의례처럼 닦는 하나의 코스와 같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부정관은 혐오하고 피하고 싶은 수행방법일수도 있지만 이 수행법만큼 탐욕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것은 없었기에 교육과 수행의 측면에서 권장되었던 것이다.

 

부정관의 수행을 하면 일체의 탐욕이 없어진다. 탐욕이 있었던 사람이 부정관을 수행함으로써 탐욕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부정관의 수행을 통해 무탐(無貪)의 인간으로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욕이 있는 사람을 탐욕이 없도록 인도하는 것이 부정관의 교육목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상에서 기술한 부정관의 내용은 교육내용에 해당한다.

그런데 불교적 학습자에게 가르치는 교육방법은 이상 부정관의 내용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사론의 다른 품에 나오는 내용들과의 유기적 관련속에서 불교적 학습자들에게 교육이 이루어질 때 부정관의 내용이 제대로 학습되어질 것이다.

 

2) 입출식념(入出息念)과 사념주(四念住)의 교육적 함의

 

그 다음 유가 수행자는 부정관의 기반위에 수식관(數息觀)을 닦게 된다. 이 수식관 수행은 초기불교의 대념처경에도 나타나 있는 수행법인데 부파불교의 현성품 가운데 3현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동요가 있으므로 이 수식관, 즉 입출식념의 수행은 수행자라면 반드시 닦아야 하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의 부정관의 수행은 외부에 형체로 나타나는 것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탐심에 대한 대치(對治)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동요를 대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 스님은 식념息念이라고 표현하면서 초기경전에 나타나 있는 아나아파나념阿那阿波那念이라고 또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아나阿那는 지식입持息入, 즉 숨을 들이쉬는 것이라고 하면서 바깥의 숨을 몸안으로 들어오게 흡입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들숨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아파나阿波那는 지식출持息出, 즉 몸안의 숨을 밖으로 내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날숨을 말한다. 범어 산스크리트 원전에서는 수식관을 호흡에 의한 마음챙김(Mindfulness of breathing), ānāpānasmṛti로 표현하고 있는데, Āna는 숨이 들어감(in-breathing)이고, apāna는 숨이 떠나는 것(out-breathing)이다. 그리고 마음챙김(mindfulness; smṛti는 이 들숨과 날숨에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범어 산스크리트 원전에서는 구체적으로 들숨과 날숨에 의해 prajñā, 즉 혜()가 이루어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현장은 이것을 혜로서 특성으로 삼는데, 념을 말하는 것은 념에 의해 힘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以慧為性而說念者念力持故]이다.

 

이 들숨과 날숨에 의한 마음챙김은 다섯 군데에서 개발되는데, 初禪, 2, 3등 세 가지 정려(靜慮)[sāmantakas], 근분정(近分定)의 중간 상태의 선정[dhyānāntara], 그리고 욕계(欲界; 욕심을 특성으로 하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한다. 원어로는 Kāmadhātu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면 실제로 들숨 날숨에 의한 마음챙김의 수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살펴보자. 마음챙김의 수행은 여섯 가지 특성을 지닌 것[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8a08.此相圓滿由具六因一數二隨三止四觀五 轉六淨.]에 나타난다. 즉 마음챙김은 첫째, 수를 세는 것(; counting), 둘째, 따르는 것(; following), 셋째, 집중하는 것(, fixing), 넷째, 관하는 것(; observing), 다섯째, 바꾸는 것(; modifying), 여섯째, 정화하는 것(; purifying) 등의 특성이 있는데, 이 여섯 가지 특성이 바로 수행방법이다. 또한 이 여섯 가지 들숨 날숨에 의한 마음챙김의 수행은 교육내용이기도 하다. 불교교육은 일반 학교에서의 교육과 다른 특성을 갖는데 이론으로만 교육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항상 이론 교육 뒤에는 수행이 따른다. 그리고 교육 따로, 수행 따로가 아니라 수행이 교육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불교교육의 특성을 일반적인 학교교육은 갖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교육은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여섯 가지 수행법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수를 세는 것[]은 들숨과 날숨의 입출식을 인연으로 하여 어떤 가행加行도 짓지 않고,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오직 둘숨과 날숨에 의해 숨을 쉬는 것[입출식]만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하나에서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숫자를 헤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마음이 들숨과 날숨에 너무 매달리거나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 “數謂繫心緣入出息不作加行放捨身心唯念憶持入出息數從一至十不減不增恐心於現極聚散故.”]이다.

그런데 들숨과 날숨에 의해 숫자를 헤아리면서 피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숫자를 빼면서 헤아리는 것으로 둘이라고 헤아려야 하는데 하나라고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둘째, 보태서 숫자를 헤아리는 것으로 하나라고 헤아려야 하는데 둘이라고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셋째, 혼동되어서 숫자를 헤아리는 것으로 들숨을 날숨이라고 하고 날숨을 들숨이라고 하는 것[아비달마구사론, T.29, p.0117b22. “然於此中容有三失一數減失於二謂一. 二數增失於一謂二. 三雜亂失於入謂出於出謂入.“ 범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숫자를 셀 때 열보다 적게 세지 않고, 열보다 많게 세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을 말한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의 입출식에서 이와 같은 세 가지 종류의 과실이 없다면 이것은 바른 헤아리기[正數]이다. 만약에 중간에 마음이 흩어져 어지러운 자는 다시 하나부터 차례대로 숫자를 헤아리고, 이것이 끝난 뒤에는 다시 시작하여 선정을 얻을 때까지 계속한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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