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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0/07/27 16:28:33  이한규
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 강좌(16)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에서는 입출식념의 나머지를 다루고, 4념처(四念處), 4념주(四念住) 수행에 의해 전개되는 4선근의 수행-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법世第一法-에 나타나 있는 교육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 다음 두 번 째, 따르는 것, 즉 수가 있는데, 이것은 유가 수행자가 마음을 들숨과 날숨의 입출식을 인연으로 무엇인가 추가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숨이 들고 나갈 때 집중하는 생각[]이 항상 쫓아 따라가는 것[念恒隨逐]인데, 멀리 어느 곳까지 가는지 생각한다. 숨이 유가 수행자의 몸에 들어갈 때[吸氣] 몸 전체로 가는지, 몸의 일부분으로 가는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숨이 그의 몸에 들어갈 때 목구멍, 심장, 배꼽, 엉덩이, 넓적다리, 무릎, 종아리, 내지는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것들을 따라 쫓으며[隨逐]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숨이 그의 몸에서 나갈 때[呼氣] 집중하는 생각[]이 몸을 떠나는 것은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의 거리와 양손을 편거리이다.

 

그 다음 세 번째, ()는 집중하는 것[fixing]으로 유가 수행자가 구슬을 꿰고 있는 실과 같이 코 끝에, 미간(眉間), 또는 발가락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집중하는 데, 몸 안의 숨 쉬는 곳에 진주목걸이를 단 줄이 있다고 관()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태에서 찬[], 따뜻한[], 손해를 끼치는 것인지, 이익을 주는 것인지 주시한다.

 

그 다음 네 번째, ()은 관찰하는 것[observing], 즉 입출식(入出息 ; 들숨과 날숨)은 바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네 가지 요소들(the four primary elements ; )과 이들 네 가지 요소들로부터 파생한 물질, 그리고 마음[]과 마음의 법들[心所]이라고 유가 수행자는 관찰한다. 이와 함께 그는 오온(五蘊 ; the five skandhas)을 경계로 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그 다음 다섯 번째, ()은 바꾸는 것[또는 移轉하는 것 ; modifying]으로 유가 수행자가 숨을 쉬는 바람을 소연(所緣 ; 인식의 대상)으로 하는 념, 즉 각지(覺知; )로 바꾼 뒤 세간의 제일가는 법들[transworldly dharmas ; 世間第一法位]을 포함하여 보다 나은 법들[勝善根]을 지향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다음 여섯 번째, ()은 정화하는 것(purifying)으로 승진(昇進)하여 견도위(見道位) 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여섯가지 입출식념 수행 가운데 다섯 번째 전()과 여섯 번째 정()에서는 뒤에 나오는 4선근 가운데 세간 유위법중 최상의 법인 세제일법(世第一法)과 성자의 수행위에 들어가는 견도위(見道位)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입출식념 따로, 4선근 따로 다룰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만큼 구사론 현성품(賢聖品)은 각 품간에 유기적(有機的)으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입출식 수행에 의해 사마타(奢摩他)를 이룬 유가 수행자는 위빠사나[구사론은 毘鉢舍那로 표기하고 있음) 수행에 의한 사념주(四念住)를 닦는다. 수행자는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서 사념주(四念住)인 몸[]과 감각기관[]과 마음[]과 법()을 관(; passana)하는데, 자상이란 원어로는 svalakṣaṇa인데, []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 별도로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하며, 공상(共相)이란 원어로는 sāmānyalakṣaṇa인데, []과 감각기관[]과 마음[]과 법()에 대해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모든 연기된 존재, 즉 일체 유위법은 무상성(無常性), 즉 항상성[常性]이 있는 것이 아니고[impermanent], 일체 유루법[all impure dharmas]은 괴로움의 특성[苦性]을 지니며, 일체의 법[all the dharmas]은 공성(空性)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특성[여기서는 非我性]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해 자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신체[kāya, ]의 자상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가리키고, (; vid)의 자상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감수(感受)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음 ; ]의 자상은 요득(了得)하는 것을 가리킨다. 법의 자상은 이상 신(), (), () 세가지를 제외한 것을 가리킨다. 이 자상과 공상[共相; 진제역 구사석론에서는 총상(總相)이라고도 한다]의 수행법은 앞에서 살펴본 5정심관과 함께 3 (三賢)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극미(極微)의 찰나(刹那)에 몸을 관할 때 신념주(身念住)가 이루어진다고 현장역 구사론에서는 비교적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원전에서는 수행자가 몰입의 상태에 있을 때[samāh-ita] 이와 같은 원자들과 찰나의 순간[kṣaṇa]들을 보게 된다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현장역 구사론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으나 진제(眞諦) 역 구사석론(俱舍釋論)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나 찰나멸의 순간에서 비롯하는 바른 견해(由隣虛分及刹那滅正見)’라고 표현하고 있다.[T.29. 阿毘達磨俱舍釋論 卷第十六, 分別聖道果人品第六,

0270c16.]

그런데 이 신(), (), (), () 등 사념주(四念住]는 자성(自性), 상잡(相雜), 소연(所緣) 등 세 가지를 별개로 하는 바탕[]을 지닌다. 첫 번째, 자성념주(自性念住)는 지혜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지혜는 문소성혜(聞所成慧), 사소성혜(思所成慧), 수소성혜(修所成慧) 3 ()이 있다. 앞에서도 이 세가지의 지혜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세가지 지혜는 자성념주의 수행에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차례를 나타내고 있다. 스승이 설하는신(), (), (), () 등 사념주(四念住]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을 사유하고, 이어서 이것을 닦음으로써 각각 지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상잡념주(相雜念住)는 이 지혜[]를 자성으로 하는 념주와 같이 생하는[mindfulness through connection] 다른 모든 법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상잡념주는

지혜가 아닌 다른 법들과의 연결에 의해 지혜와 함께 공존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소연염주(所緣念住)는 자성념주(自性念住)와 상잡념주(相雜念住)의 소연(所緣 ; 인식의 대상)이되는 념주(念住)라는 것이다.

 

사념주는 각각 자성념주이든, 상잡염주이든, 소연염주이든간에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 왜냐하면 념()의 힘을 유지함에 의해 작용이 있는 것이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에 의한 수행이고, 지혜에 의한 교육, 달리 표현하면 지혜에 의한 인간형성의 교육이 되는 것이다. 진제역 구사석론에서는 자성염주를 자성염처(自性念處)라고 하면서 이 자성염처는 문, , 세가지를 닦아서 생기는 지혜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자성염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고[언어에 의한 학습을 의미한다], 생각하며[언어에 의한 학습으로부터 생성하는 개념의 획득을 의미한다], 닦는 과정[이 닦는 과정은 오직 불교에만 있는 교육과정의 요소이다.]이 교육과정의 구성요소이며, 이들은 각각 교육과정 언어, Curricular Language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교육과정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사념주는 신념주의 수행부터 시작한다. 현장역 구사론은 이 신념주의 수행을 신주순신관(身住循身觀)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원전에서는 이것을 수행자가 대상으로서 몸을 관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kāye kāyānupaśyanā smṛtyupasthā-nam]

 

수행자가 kāyānupaśyin(循身觀者), anupaśya(몸의 부분들을 숙찰熟察하는 것) 또는 darśana(바로 보는 것; 심사숙고하고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역 구사론과 마찬가지로 원전에서도 이 신념주(身念住)에 의해 자성염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몸에 대한 순관(anupaśyanā)을 통해서 지혜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以上에서 몸에 의해 지혜가 있게 되는 신념주(身念住)가 사념주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사론 현성품 가운데 부정관과 입출식과 신념주의 수행은 몸에 관한 수행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정관은 여섯 가지 특성을 들어 몸의 부정(不淨)함을 설명하고 있는데 몸안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차 있어서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은 서구에서도 있었는데, 중세시대 뿐만 아니라 메를로 퐁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동양과 문화적, 종교적 차이가 있지만 영육(靈肉) 가운데 신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곤 했다. 즉 몸은 부정해야 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부정한 것들로 가득차 있어서 혐오의 대상이지만 이 몸을 기반으로 몸에 대한 순관(循觀)을 통해 탐욕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몸은 비록 부정의 대상일지라도 부정의 대상에서 긍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입출식념의 수행에서는 들숨과 날숨의 수행을 통해 심일경성(心一境性)의 경지에 이르게 되니 몸의 긍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관과 입출식념의 수행은 각각 몸에 대한 관찰(觀察)에 의해 탐욕이 없어진다는 점과, 들숨과 날숨의 수행에 의해 마음의 평온과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고 지혜가 성숙한다는 점에서 인간형성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다. 몸에 대한 관찰을 하는 신념주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원전에 따르면 거치른 것, 즉 추()한 것이 몸이기 때문에 몸에 관한 관찰인 신념주의 수행이 먼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몸은 탐욕이 발생하게 하는 장소이고 감각작용을 일으키는 수()에 애착(愛着)하여 탐욕이 일어나므로므로 탐욕의 원인인 몸이 먼저 제어가 되지 않고서는 마음이 잘 닦여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 대승불교 교리인 유식학에서와 같이 만법유식(萬法唯識), 즉 마음을 67, 8으로 구분하여 이들 각각의 식()이 여러 가지 법과의 작용을 하는 수행이 아니라 몸 먼저 그 다음 마음의 순서로 수행을 했던 것이다. 몸에 대한 수행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순차적으로 그 다음에는 감각, 즉 느낌에 의해 애착이 발생하므로 이에 대한 관찰인 수념주(受念住)의 수행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이러한 애착이 마음에 의해 억제되지 않으면 일어나게 되므로 심념주(心念住)의 수행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애착이 제어되지 않는 것은 번뇌가 끊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므로 미세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법념주(法念住)의 수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교육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스승 비구가 학생인 비구에게 먼저 제일 거친 몸에 관한 관찰과 수행을 위한 가르침을 펴고, 그 다음 순차적으로 수념주와 심념주와 법념주의 수행을 교육방법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수행의 순서는 신념주, 수념주, 심념주, 법념주 각각에 대해 네 가지 전도顚倒에 대한 대치對治가 전개된다. 즉 정· · · 등에 대한 대치가 이루어진다. 대치란 바로 알고 있지 못한 상태로부터 바르게 아는 상태로 바뀌는 것, 달리 표현하면 이러한 대치의 과정은 이제까지 잘못 생각하고 판단해 온 상태로부터 전혀 다른 상태로 마음이 전환(轉換)하는 인간형성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치의 과정을 살펴보면, 신념주를 비롯한 수념주, 심념주, 법념주 각각에 자기(自己)의 상속을 소연(所緣 ;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또한 타자(他者)의 상속을 소연으로 하고, 또한 자()와 타() 양자(兩者)의 상속을 소연으로 하는 등 세 가지 소연이 전개된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수행자는 안으로 몸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바른 지혜와 바른 집중으로 세상의 탐욕과 우려되는 것을 억제하여 머무른다. 수행자는 바깥으로 몸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바른 지혜와 바른 집중으로 세상의 탐욕과 우려되는 것을 억제하여 머무른다. 수행자는 안과 밖으로 몸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바른 지혜와 바른 집중으로 세상의 탐욕과 우려되는 것을 억제하여 머무른다. 이것은 신념주의 세가지 종류의 수행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수념주의 세가지 수행을 한다. 수행자는 안으로 느낌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데 머무른다. 신념주와 같은 세가지 방식으로 수행이 전개된다. 나머지 심념주와 법념주도 이와 같이 세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정不淨한 것을 정으로 보는 전도顚倒에 대한 대치가 신념주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괴로운 것[]을 즐거움[]으로 보는 전도에 대한 대치가 수념주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상(無常)한 것인데 영원[]하다고 보는 전도에 대한 대치가 심념주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아(無我)인데 항상된 아[]가 있다고 보는 전도에 대한 대치가 법념주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수행자가 사념주 가운데 법념주를 중심으로 신· · 이외의 법만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부잡연不雜緣이 된다. 반면에 수행자가 법념주를 중심으로 以上 · · 가운데 둘 또는 넷을 소연으로 할 때는 잡연雜緣이 된다.

 

3) 난위煖位 · 정위頂位 · 인위忍位 · 세제일위世第一位[성자위에 들어가기 전의 수행단계]의 순차적(順次的) 교육과정(敎育課程)

 

수행자는 법념주를 총연(總緣)으로 하여 머무르며, () 등의 모든 법들을 비상(非常) · ()로서, () · 비아(非我)로서 관()한다. 이렇게 법념주를 중심으로 닦음으로써 수행자는 다음 단계로 4선근[四善根]의 첫 번째 수행위修行位인 난(ūṣmagata)에 이르게 된다. 난이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은 번뇌[]의 땔깜을 연소燃燒한 성도聖道의 불이 있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난위는 성자(聖者)의 조짐이 미약하게나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단계이다. 이것으로서 우리는 난위의 인간형성의 상태를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부터는 사성제, 즉 사제(四諦)를 수행의 대상으로 하는 16행상[十六行相]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고제(苦諦)4행상[四行相]에 의해 관()한다. 무상(無常) · () · () · 비아(非我)로서 한다. 두 번째, 집제(集諦)4행상에 의해 관()한다. () · () · () · ()으로서 한다. 세 번째, 멸제(滅諦)4행상에 의해 관()한다. () · () · () · ()로서 한다. 네 번째, 도제(道諦)4행상에 의해 관()한다. () · () · () · ()로서 한다.

 

이상과 같이 아래[]로부터 가운데[], 그리고 위[]의 단계로 수행자가 순차적으로 수행을 전개(展開)한 상태에서 난위煖位의 다음 단계인 정위頂位에 도달하게 된다. 원전에 의하면 정위는 난위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 차이점은 동선근動善根의 정점頂點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것이다. 즉 정위에서 물러나 떨어질 수도 있고, 또는 더 앞으로 전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동不動이 아니라 동선근動善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친의 저서를 주소註疏한 칭우稱友도 마찬가지로 난위와 정위가 비슷한데 정위라고 별도로 말하고 있는 까닭은 동선근의 정점이라고 말하면서 그 상태의 극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위의 다음 단계인 인위忍位와 세제일법世第一法이 부동위不動位인 것과 비교가 된다. 그런데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난위가 아래 단계이고, 그 윗 단계가 정위가 된다. 현장역 구사론에서는 정위(頂位)를 산의 정상에 비유하고 있다. 정위는 난위와 마찬가지로 4성제 가운데 고성제에서 무상(無常) · () · () · 비아(非我)4행상으로 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도성제의 도() · () · () · ()4행상을 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16行相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정위(頂位)에 도달한 수행자는 아래[]로부터 중간[], 그리고 위[]의 차례[次第]로 수행을 하게 되는데, 정위 다음 단계로 인위(忍位)에 도달하게 된다. 이 인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단계이기 때문에 최상의 진리를 얻어 인가를 받은 인(; kṣamaṇa)이라고 불리어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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