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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0/09/21 10:34:16  이한규
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 강좌(18)
1. 견도위(見道位) ·수도위(修道位) · 무학위(無學位)의 교육과정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서술하면, 그 다음 견도위는 두 가지 종류의 수행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수신행隨信行이고, 두 번째는 수법행隨法行이다. 견도위의 수행이 수신행과 수법행으로 나뉘는 것은 근기의 둔함과 둔하지 않음[鈍利]으로부터 비롯한다. 근기가 둔한 사람은 수신행을 따르고[이 사람은 수신행자(śraddhānusārin)라고 불려진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은 수법행에 따른다.[이 사람은 수법행자(dharmānusārin)라고 불려진다] 수신행은 믿음[]에 의해 견도에 들고, 반면에 수법행은 4성제법을 관하여 견도에 들기 때문에 각각 수신행과 수법행으로 불리는 것이다. 수신행은 신해信解로 불려지기도 한다. 수법행은 견지見至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견도는 44에 의해서 보면, 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수신행자와 수법행자가 세간의 도에 의해 수소단의 번뇌를 끊지 않고 번뇌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16번째 마음인 도류지道流智부터는 수도위修道位이다. 수도위는 반복적으로 닦고 익힘으로서 습관적으로 수행하는 단계이다. 수도위에는 예류과 · 일래향 · 일래과 · 불환향 · 불환과 · 아라한향 등 여섯 종류의 성자聖者가 포함된다.

 

수도위修道位에는 끊어야 할 번뇌가 아홉 단계이다. 下下品, 下中品, 下上品, 中下品, 中中品, 中上品, 上下品, 上中品, 上上品 등이 그것이다. 수도위의 아홉단계의 수행과정은 인간형성의 과정이다. 이 인간형성의 모습에 대해 구사론은 비유로서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옷을 세탁할 때 조잡하고 더러운 때를 먼저 제거하고, 그 다음에 미세한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큰 어둠이 미미한 빛에 의해서 사라지고, 세부의 남은 어둠이 강력한 빛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유가수행자들 가운데 욕심을 많이 여읜 자는 以上 아홉 가지 번뇌 가운데 일곱 가지 번뇌[7]나 여덟 가지 번뇌[8]가 세간의 에 의해 끊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아홉 가지 번뇌가 모두 끊어져 있는 사람은 완전히 욕심을 여읜[全離欲, kāma-vītarāga) 사람이다. 이 완전히 욕심을 여읜 자는 욕계欲界로부터 번뇌의 더러움을 여읜 자, 혹은 上界에서 번뇌의 더러움을 여읜 자이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모든 번뇌들 가운데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아직 消滅하지 않고 에 머무르고 있는 자는 일곱 번 태어난다.[일곱 번 태어나므로 七返生, 즉 일곱 번 돌아와 출생한다] 만약 수소단修所斷의 번뇌가 한 가지[一品]라도 끊어져 있지 않다면, 그는 예류預流이다. 416행상 가운데 향도向道(前十五心)와 과도果道(第十六心)를 얻었기 때문에,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얻었기 때문에, 그리고 道流智에서 모두 성자의 흐름에 들어 416을 현관現觀하기 때문에 그는 예류預流가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번뇌, 第五品에 이르기까지를 끊은 자는 두 번째 과하는 자이다. 즉 그는 일래향一來向으로 향하는 자이다. 그 다음 수행위인 여섯 번째 번뇌, 第六品을 소멸한 자는 일래一來에 도달한다. 그는 성자위 가운데 두 번째 를 얻은 자가 된다. 그는 천상[天趣]에 갔다가 인간세상에 한번 오므로 일래一來가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탐· · 가 박[적어졌다]해졌다고 설하고 있는데, 아직 하품의 탐· · 가 잔존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 만약 그가 9품의 번뇌 가운데 7품이나 8품을 소멸시킨다면, 대치對治인 무루근無漏根을 얻는다면, 그리고 한번의 만이 남아 있다면, 그는 세 번째 과불환과不還果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일래과一來果에 머무른 자가 욕계의 아홉 가지 번뇌, 9 품의 번뇌를 모두 끊는다면 불환과不還果를 이룬다. 불환과에서는 유신견有身見 · 계금취견戒禁取見 · · 욕탐欲貪 ·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끊어진다. 불환에는 9종의 불환이 있다고 하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 다음 불환은 아라한도를 향해 가는데, 아라한도는 유가행자가 도달해야 할 최종목적지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무간도無間道에 의해 아라한도를 향해 가는데, 이 무간도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불려진다. 이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의 힘에 의해 모든 번뇌인 수면隨眠을 파쇠시키게 되는데, 무간도 가운데 최상이기 때문에 모든 수면 번뇌를 파쇠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금강유정에 의해 아홉 가지 번뇌를 끊는 것과 함께 진지盡智가 있게 되는데, 이 진지盡智는 금강유정으로 아홉 가지 번뇌를 끊은 직후에 발생하는 마지막 해탈도解脫道라고 한다. 모든 번뇌를 멸진滅盡함과 동시에 최초로 발생하므로 진지盡智라고 한다. 그는 그 때 무학無學의 아라한阿羅漢이 된다. 진지盡智가 생할 때 아라한향阿羅漢向은 무학無學이 되고, 아라한의 특성(阿羅漢性)이 있는 과를 얻어 아라한이 된다. 탐욕이 있었던 자로부터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유가수행자는 아라한이 됨으로써 불교의 인간형성의 최종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 대승불교의 교육과정(中觀 · 唯識人間形成過程)

 

기원전 1세기경 불탑을 중심으로 재가 대중들이 부처님 당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대승불교의 발흥發興이다. 반야, 법화 등 경전은 당시 초기 대승불교시대(BC 1세기~AD3세기)의 사상을 담고 있다.

 

초기 대승불교시대의 교리를 대표하는 반야경전般若經典에서는 공사상空思想을 실천하는 보살菩薩이 등장하는가 하면, 법화경전法華經典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소승비구의 퇴장장면이 나타난다. 대승불교 중기(AD 3세기~6세기 중엽)에는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 사상思想, 유식사상唯識思想 등이 유행한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시대에는 부처님의 교설에 대한 해석과 그 실천등이 혁명적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교육실천을 위한 이념인 교육철학과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교육과정에 필요한 교육목적의 수립과 계획, 교육방법 등의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시대가 초기를 거쳐 중기, 후기로 갈수록 여러가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논서와 경전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일이 있었으니 C E 150~250에는 불세출의 나아가르주나, 즉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출현하여 위대한 저서인 중론中論을 저술하게 되고, 이후 세친世親에 의해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 저술된 것을 들 수 있다. 바야흐로 공사상과 유식사상의 시대, 즉 대승불교의 꽃이 활짝 피고 열매를 맺는 시대에 이르게 된다. 과 유식唯識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사상은 여래장, 화엄, 정토, 밀교 등 대승경전과 중국에서 발흥한 禪宗,그리고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1 ) 대승불교의 교육원리

(1) 교육원리 : 교육이념으로서의 대승불교 사상

대승불교는 부처님 입멸후 전개된 부파불교와 달리 이타적 利他的 이념으로 보살이 세간에서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살의 이타행,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덕목과 함께 반야般若의 공의 개념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의 개념등이 교육철학의 이론이 된다. 달리 표현하면,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에 걸맞게 전개된 정토사상, 법화사상, 화엄사상, 중관사상, 유식사상, 밀교사상 등이 모두 교육철학이 된다. 이 가운데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용수의 중론中論에 나타난 공과 세친의 유식唯識 등을 중심으로 교육원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론中論의 공사상空思想이 나타내고 있는 교육과정

대승불교의 비조鼻祖라고 불리고 있는 용수龍樹는 반야의 공사상空思想을 집약한 중론송中論頌에서 중론 전체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팔부중도八不中道의 개념으로 공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팔부八不를 통해서 일체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一切皆空) 같이 보이나 사실 단순한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부정을 통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중론송의 게송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하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고, 단멸斷滅하는 것도 없고, 상주常住하는 것도 없고, 동일同一한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희론戱論을 지멸止滅, 길상吉祥, 연기緣起를 설하신 正覺者, 설법자 중에서 가장 수승하신 부처님께 나는 경배敬拜한다.” 中論, T.30, 觀因緣品第一, p.0001a06.不生亦不滅不常亦不斷不一亦不異不來亦不出, 能說是因 緣善滅諸戲論我稽首禮佛諸說中第一.

 

과 멸, 과 상, 동일함과 다름, 과 옴등의 둘을 하나로 묶어 4로 열거한 이유는 이들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불이不異(anānārtha), 즉 실제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론의 10장 땔나무와 불의 상관관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게송을 살펴보도록 하자.

 

만약 타오르는 불이 타오르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땔감이라면 행위와 행위를 짓는 자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타오르는 것이 타오르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땔감과 다르다면 타오르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땔감을 떠나서 타오름이 있는 것이 된다.” 中論, T.30, 위의 책, p.0014b23.若燃是可燃作作者則一若燃異可燃離可燃有燃.

 

이 게송에 대한 해석을 보면, “타오르는 것은 불이고, 타오르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땔감나무이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짓는다는 것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타오르는 불과 타오르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땔감나무는 하나이다. 그리고 타오르는 행위를 하는 것과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짓는 행위와 짓는 자가 하나라면 도자기를 만드는 스승과 도자기는 하나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자는 도자기를 만드는 스승이고, 만든 결과는 도자기이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만드는 스승이 도자기가 아니라면 도자기는 도자기 스승이 아닌 것이 된다.”中論, T.30, 같은 책. p.0014c06.燃是火可燃是薪. 作者是人作是業. 若燃可燃一則作作者亦應一. 若作作者一則陶師與瓶一. 作者是陶師作是瓶陶師非瓶瓶非陶師.

 

땔나무와 불은 상의相依로서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면서 또한 아무 관계도 없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둘 사이는 상호 인연 관계에 의해 땔감나무의 각자로 성립하면서 불타오름이 성립한다. 게송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땔감나무를 인연으로 하지 않고 항상 응당히 타오르는 불이 생긴다고 한다면 그런 즉 타오르는 불의 공력은 없게 된다. 역시 불이 타오르게 하는 것을 지음이 없게 된다.”中論, T.30, 같은 책. p.0014c06.如是常應燃不因可燃生則無燃火功亦名無作火.

 

논리적으로 땔감나무의 인연이 없이는 불이 타오를 수 없다는 의미를 이 게송은 담고 있는데, 게송의 해석에서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만약 타오르는 불과 땔감나무가 다르다면 타오르는 불은 땔감나무를 기다리지 않고 항상 타오름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름의 상태에 있다면 그 자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며 인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사람의 공력은 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공력이란 장차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여 타오르게 하여 이 공력이 나타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 땔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中論, T.30, 위의 책. 0014c16.若燃可燃異則燃不待可燃而常燃. 若常燃者則自住其體不待因緣人功則空. 人功者將護火令燃. 是功現有是故知火不異可燃.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고 있다. “땔감나무를 인연으로 하는 타오르는 불은 없다. 무엇을 인연으로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타오름이 없다. 타오름을 인연으로 하여 땔감나무는 없다. 무엇을 인연으로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땔감나무도 없다.”中論, T.30, 위의 책. 0015b22因可燃無燃不因亦無燃因燃無可燃不因無可燃.

 

그러면 여기에서 상반되는 것의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와 거자去者, 거자去者와 불거자不去者, 과 불견不見, 과 견자見者, 과 빈자貧者, 과 작자作者, 과 색의 인, 무상無相과 유상有相, 능상能相과 소상所相, 와 비유非有,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과 무성無成, 와 불이不異, 자성自性과 타성他性, 과 불공不空, 과 부정不淨, 전도顚倒와 불전도不顚倒 등이 서로 상반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 상반되는 것들은 각기 상대방을 용인하지 못하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나 용수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정은 어디까지나 부정이고, 그 속에 긍정을 포함하지 못하며, 또한 긍정 곳에 부정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대해 희론(prapañca)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을 분별分別(vikalpa)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분별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이것은 주관이고 저것은 객관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수는 분별의 사유를 부정하면서 무분별의 분별을 나타내고 있다. 무분별은 반야가 되며 이것으로서 사유를 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에 의하면 부처님이 설한 언어는 증득의 법가르침의 법으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 이 증득의 법이 근본이 되어 가르침의 법을 대중들에게 설하여 전자인 증득의 법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론의 교육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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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1건)
한글날 세종대왕님 신미대사님 한글 감사합니다 한글날 세종대왕님 신미대사님 한글 감사합니다  l  2020.10.10
한글날 세종대왕님 신미대사님 한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애국애민정신으로 한글 창조한 세종대왕님과 신미대사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종교인들은 제발 코로나 롹산시키지 마라 나라 망치는 나쁜놈이다 대한민국이 약하니가 일본도 g-ral 북한도 g-lal 중국도 g-ral 하는것이다 코로나때문에 최소 수십조원이 손실이다 이돈이면 매일 1000억원짜리 중소기업을 만들고 남는돈이다 정신차려라 제발 종교 맹신바보들아 제발 정신차려라 코로나 확산시키지 마라 나라망치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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