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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2/10/21 11:52:39  이한규
배길몽 작가의 상식 뒤집기(16회)
변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필자가 과거에 법보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을 때 서울대학교와 명성이 맞먹는 유명 대학교의 교수이며 불교계에 잘 알려진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필자의 칼럼에 대해서 항의를 여러 번 했다면서 법보신문 측에서 필자에게 서로 아는 사이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필자가 그 칼럼니스트와 직접 대면은 없었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라고 설명해주면서 그렇게 비공식 라인으로 항의하지 말고 칼럼니스트답게 정식으로 칼럼을 통해서 필자의 칼럼에 반박하게 하라고 요청했더니 그 다음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반대 의견이 있다면 자신도 당당하게 칼럼으로 제시하던지 아니면 필자에게 토론을 신청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것이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최근에 필자가 유튜브를 보다가 유명한 어느 스님이 보시에 대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이 보시는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연법에 따라서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통찰해보면, 보시물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왜 그 보시물은 보시가 행해지기 전에는 보시물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존재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강물이 흐를 때 상류에 있는 사람들이 뚝()을 막아서 물이 하류로 흐르지 못하도록 하거나 물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것처럼 부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상류(좋은 위치와 환경)에서 너무 많은 재물을 취하므로 하류(열악한 환경)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물을 획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시혜(자비)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로채거나 빼돌린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배상(회개)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시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업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므로 보시하면서 더 큰 복을 기대하지 마라. 보시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면 이미 그대는 복을 받은 것이고 그 복에 감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보시할 수 있는 복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된다.

 

그리고 사찰에 제공되는 보시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제공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승려들은 그 보시물을 건전하게 수행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호식을 넘어서 심지어 불법 도박이나 각종 비리에도 사용한다. 그런데 앞에서 보시에 대해서 설법한 스님의 말처럼 사찰은 보시물이 있어야 할 정당한 자리가 아니니까 사찰에 제공된 보시물이 스스로 알아서 다른 올바른 곳으로 찾아간 것일까? 아니면 보시물이 사찰로 지나치게 많이 들어 왔으므로 스님들이 잉여분의 보시물을 속세에 다시 보시했을까? 그러지 말고 잉여물이 있다면 가난한 이웃의 작은 사찰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부처님의 법을 잘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이 가진 기본 성질이 욕심(성욕, 식욕 등)이다. 남자의 정충 수 억 개 중에서 1등을 한 것만 태어난다. 강한 욕심이 없다면 아예 태어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욕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욕심이 지나치게 커져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므로 욕심을 줄이려는 운동이 바로 종교다. 그리고 좋은 말로 욕심을 줄이라고 하면 아무도 말을 듣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종교가 내세(지옥과 극락)라는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다.

 

내세를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좋은 말로만 교육하면 그것을 도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도덕에 당위성을 부여 하는 것이 철학인데 지금까지 철학은 구속력이 없는 당위성만을 주장해서 실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도덕을 지키면 좋다고 철학처럼 논리로 설득할 것이 아니라 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그렇게 실현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 법률이다. 법률은 구속력을 가지므로 지켜야 하지만 교묘하게 혹은 힘으로 빠져나가는 무리가 많다. 그런데 이런 것들(종교, 도덕, 철학 등)에 모두 과학(우주의 작동 원리)이 결여되어 있다. 이제 과학적 근거 위에서 만들어진 올바른 철학을 기반으로 사회가 작동하도록 법과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과학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기존의 과학은 오류로 가득하고 그래서 과학이 종교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데 남의 일에 옳고 그름의 가르마를 타줄 수 있겠는가?

 

옳고 그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그 중에서 남녀의 성관계에 대한 옳고 그름이나 그 가치관도 변해야 한다. 부부간의 건전한 성적인 교합은 두 사람의 유대를 강화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이것이 부부가 아닌 사람들은 물론 수행자들 사이에도 자제가 잘 안 되어서 많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다. 음양의 문제는 참으로 통제하기 어렵다. 혈기 왕성한 남녀가 만나면 생명체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 매우 강력한 기전(호르몬)이 작동하여 뇌에서 이성적인 판단 회로가 차단되고 동물적인 감성만이 작동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이 사랑의 결과이거나 혹은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과 결혼은 출발점이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랑은 자연의 산물이고 결혼은 인위적인 제도인데 이질적인 두 요소를 무리하게 하나로 결합함으로서 오히려 부작용이 많이 생긴다. 사랑은 다발성 질환이고 이 질환을 1회로 줄이려고 개발한 백신이 바로 결혼인데 이 백신의 효과가 코로나 백신처럼 신통치 않다. 그래서 사랑을 믿고 결혼을 덜컥 하면 매우 위험하다. 결혼에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질환에 불과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품성이다. 결혼에 있어서 품성이 기본이고 사랑은 옵션이다.

 

기독교 교리가 이혼을 금하고 있다. 기독교가 이혼을 금한 이유를 제대로 알려면 성경이 만들어진 2천 년 전의 사회상황을 알아야한다. 성경은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노약자들은 사람의 숫자를 셀 때 포함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힘센 남자의 숫자가 진정한 인구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여자를 마치 남자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쯤으로 여겼고 그래서 이혼하지 말라는 것은 기르던 애완동물을 버리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바뀌어 여권이 신장했고 오히려 남자가 부인에게 학대받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혼은 약자를 버리는 부도덕이 아니라 불행한 부부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수행자들이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성욕이다. 그런데 성적인 결합에서 오는 쾌감은 단순히 호르몬과 생체 전기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잘 극복하기 바란다. 만약에 인간이 기독교의 주장처럼 조물주의 작품이라면 성적인 본능은 인간을 신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신이 인간에게 침투시켜놓은 악성코드다. 인간은 성추행이나 간음을 비롯하여 성범죄를 짓기 마련이고 죄를 지은 인간이 천국에 가려면 조물주에게 노예처럼 충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성적인 악성코드를 심어놓았다면 그것은 조직 깡패나 마약 상인들이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마약으로 중독 시켜놓은 것과 비슷하다.

 

종교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며 공익 법인과 유사한 단체다. 정부도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필요한 만큼만 예산을 편성하고 그래도 사용하다가 남으면 반납하거나 이월해서 다음 예산에서 그만큼 삭감한다. 그와 같이 종교도 수행이나 불사(건축)에 필요한 만큼만 보시를 받아야 하고 혹여 남아도 기업처럼 비축하지 말고 이웃의 가난한 사찰에 보시할 것을 권장한다. 모든 비리와 부정은 돈의 비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찰이 돈의 사용에 대해서 맑지 못하면 어찌 청정 도량이라고 할 것이며 어찌 불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모든 세상이 진화하고 있는데 종교만 진화(변화)를 거부하고 있는데 계속 그대로 버티면 결국 신도들로부터 멀어지고 존재 여부마저 기로에 놓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검토해보면 대중이 갈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별도로 만들어진 극락(천당)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극락(천당)은 특별한 공개 장소에 마트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마음속에 만들면 있는 것이고 만들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스님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불자들은 극락에 가려는 욕심으로 고행을 하거나 공덕을 쌓고 있다. 그런데 남(하나님이나 부처님 포함)이 만들어놓은 극락에 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극락을 만들려고 노력하라. 필자가 과학적 지식과 불교적 교리를 통합해서 성찰해보면, 진정한 해탈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벗어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생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학에서 주장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그리고 불교가 주장하는 연기와 무아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승려들이 주장하는 진아(참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무아다. 왜 무아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긴 이야기가 되므로 필자의 저서(얼굴이 밝은 성직자는 가짜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정말로 때 묻지 않고 변하지 않는 참 나 즉 진아가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법칙이 깨어지므로 진아와 무상은 함께 성립될 수 없다. 열반, 해탈, 자아 등도 모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상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흐르는 강물처럼 그리고 구름에 달 가듯이 자유롭게 살아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우주는 무상의 변화를 일으키므로 아무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 자신이 어디에도 묶이거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사실은 모든 존재가 이미 해탈되어 있으나 본인이 해탈된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만든 감옥(잘못된 생각)에 스스로 갇혀서 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한 자에게 해탈은 벗어남(이탈)이지만 깨달은 자에게 해탈은 함께 있음(공존)이다. 인간은 물론 모든 것이 연기법에 갇혀 있으므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아이므로 벗어나야 할 존재 자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아인데 무엇이 어디를 벗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인연을 끊고 해탈하면 망망대해의 우주에 오직 혼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탈해본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생사고락을 나누며 함께 살던 지구가 그리워서 다시 지구에 환생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배길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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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개발한 치약을 구매한 소비자들로부터 치석이나 잇몸 통증이 사라져서 감사하다는 리뷰(사용 후기)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소비자들이 사용법을 정확하게 읽어보지 않고 일반 치약처럼 사용해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길몽웰빙치약은 일반 치약과 사용법이 전혀 다르므로 치약을 구매하신 분은 네이버쇼핑의 판매처에서 제시하는 사용법을 꼭 읽고 정확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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