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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0/04/27 10:22:22  이한규
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 강좌(13)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나머지 불교교육의 철학적 기초가 되는 고()의 원인인 고집성제(苦集聖諦)와 그리고 고멸성제(苦滅聖諦)와 고도성제(苦道聖諦) 등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불교교육에서 압축과 발현을 왜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즐거워함으로써 집착하는 것이 갈망(갈애)이 된다는 것을 이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갈망이 유전문(流轉門)의 과정인 열두 가지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을 받아들여 집착하는 것이 갈망(갈애)이고, 이로써 열두 가지 연기의 과정인 윤회가 전개된다는 설명만으로는 무엇인가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에 대해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는 탐() · () · ()에서 각각 비롯되고, 생겨나고, 원인으로 하는 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비구들이여, 탐욕[]에서 비롯된 업(), 탐욕에서 생겨난 업, 탐욕을 원인으로 하는 업, 탐욕을 조건으로 하는 업, 성냄[]에서 비롯된 업, 성냄에서 생겨난 업, 성냄을 원인으로 하는 업, 성냄을 조건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업,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업,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 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 아주 먼 후생(後生)이든지 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111에서 재인용함]

 

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태어나서 살면서 겪는 괴로움과 윤회의 괴로움 등의 원인이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불교교육의 철학적 기초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 괴로움의 문제가 존재론적인, 인식론적인 접근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가 정신인지, 물질인지, 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우주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그 영역[한명희 · 고진호 지음, 교육의 철학적 이해, 2005, 문음사, p.40에서 인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이다. 장부(長部)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란 무엇인가? 탐욕을 버림[無貪]에 의한, 저 갈망(갈애)의 남김없는 소멸, 떠남, 완전한 파기, 해탈, 무집착 -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라[] 한다. 그러면 이 갈망(갈애)은 어디에서 버려지며, 어디에서 소멸해버리는가?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즐길만한 대상이 있는 곳에서 이 갈망은 버려지고, 소멸한다. 이 세상에서, , , , , , 마음[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망은 버려지고, 소멸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 육체의 촉감[], 마음속의 현상들[] [六境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망(갈애)은 버려지고 소멸한다. 그리고 [, , , , , 마음]의 각각 여섯 가지 의식[六識], 여섯 가지 접촉[六觸], 여섯 가지 접촉에서 생긴 느낌[六受], 여섯 가지 지각[六想], 여섯 가지 의지작용[六思], 여섯 가지 갈망[六愛], 여섯 가지 향하는 생각[六尋], 여섯 가지 머무는 생각[六伺]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망은 버려지고, 소멸한다.”

 

[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p.70-71에서 재인용함]

 

, , , , , 마음[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각각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 육체의 촉감[], 마음속의 현상들[] [六境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대상으로 하여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 있더라도 갈망(갈애)이 버려지고 소멸한 상태가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이다. 그런데 이 갈망(갈애)이 어떻게 끊어지는가 하면, 무상(無常) · () · 무아(無我) 등 세 가지 진리[淸淨道論에서는 三特相이라고 표현한다]에 대한 위빠사나 통찰(洞察)에 의해 끊어진다. 다음 상응부(相應部) 경전에서는 이것을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과거의 것이나, 현재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나,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즐길만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無常],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無我], 질병이다, 두려움이다라고 보면, 저 갈망[갈애]은 끊어져 버린다. 갈망[갈애]이 끊어져 버리면, 집착(upadhi)이 끊어져 버린다. 집착이 끊어져 버리면, 괴로움이 끊어져 버린다. 괴로움을 끊어버린 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우수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이것을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나는 말한다.”

 

[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71에서 재인용함]

 

괴로움의 소멸의 상태에 이르는 모습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상응부(相應部)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탐욕을 버림[無貪]에 의한, 저 갈망의 남김 없는 소멸에 의해 집착[]이 소멸한다. 집착의 소멸에 의해, (새로운) 존재양식[]이 소멸한다. 존재양식의 소멸에 의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의 소멸에 의해,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悲哀), 우수(憂愁)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전체 무더기의 소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물질[]의 소멸, 적멸, 종식(終熄), 느낌[]지각[]형성[]의식[]의 소멸, 적멸, 종식,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 질병의 적멸, 늙음과 죽음의 종식이라고 한다.”

 

[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72에서 재인용함]

탐욕을 버림에 의해 갈망(갈애)이 완전히 소멸하고, 갈망이 완전히 소멸함에 의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함에 의해 (새로운) 존재양식[]이 소멸하고, 존재양식의 소멸에 의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의 소멸에 의해,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悲哀), 우수(憂愁)가 소멸하는 등 모든 현상의 조건에 의한, 즉 열두 가지 緣起에 의한 소멸이 이루어진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상태를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는 열반(涅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로 이것은 평온이며, 뛰어난 것이며, 모든 형성[諸行]의 종식(終熄)이며, 모든 존재의 의지처(upadhi)의 파기이며, 갈망(갈애)의 소진(消盡)이며, 무탐(virāga)이며, (, nirodha)이며, 열반이라고 한다.”

 

벗이여, 탐욕의 소진(消盡), 성냄의 소진, 무지(無知)의 소진,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p.74-75에서 재인용함]

 

불교와 정신치료의 전문가 마크 엡스타인은 법구경의서까래는 모두 내던져졌고, 대들보는 무너졌으니라는 구절을 예로 들면서 서까래를 윤회의 중심에 있는 탐욕과 분노라는 힘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대들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정서의 근본원인인 무지라고 표현하고 있다.전현수 · 김성철 옮김, Thoughts without a Thinker ; 붓다의 심리학, pp.104-105.> 즉 마크 엡스타인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이 완전히 없어지고 무명도 사라진 해방의 상태인 열반을 법구경의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고통의 원인을 밝혀 그 해결방법을 제시한 것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이다. 우리가 팔정도(八正道)라고 알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겪는 여덟 가지 괴로움과 업의 결과로 경험하는 괴로운 윤회의 길은 갈망(갈애)이 원인이라는 것이 고집성제에서 밝혀졌다. 그런데 출가 수행자가 갈망(갈애)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안다고 해서 바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출가 수행자가 밟아야 하는 여덟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단계적 수련의 과정, 즉 점진적으로 실천을 해야 하는 과정이다. 이 여덟 가지 길은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유[正思惟],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올바른 정신집중 [正定] 등으로서 달리 이 여덟 가지 길을 표현하면 도덕적 완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팔정도의 길이 중도(中道)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래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앎을 얻게 하며,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라고[냐나틸로카 스님 엮음 · 김재성 옮김, Buddhavacanam ; 붓다의 말씀, 2007, 고요한 소리, p.78에서 재인용함] 하고 있다.

 

팔정도는 정견이 맨앞에 있어서 정견부터 닦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계()의 특성을 띠고 있는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등이 먼저 실천 수행되고, 그 다음 마음집중인 정()에 해당하는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마음집중[正定] 등이 실천 수행되고, 그 다음 지혜[]에 해당하는 바른 이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등이 실천 수행된다. 즉 팔정도를 수행하는 길은 계혜의 차제적(次第的) 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대체적으로 계혜의 차제적 수행의 길이라는 것이다.]

팔정도 수행의 길에서 출가 수행자가 계를 먼저 닦아야 하는 까닭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우선 방호(防護)하지 않고서 선정[]과 혜[, 위빠사나의 洞察智]를 닦는다는 것이 語不成說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정도에서의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등의 도덕적 수행을 불교교육의 철학적 기초에서 제일 먼저 밑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도덕적 인격의 완성, 즉 불교윤리적 특성을 띠는 교육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종교적 가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를 연결하는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가치라고[한명희 · 고진호 지음, 교육의 철학적 이해, 2005, 문음사, p.361에서 인용함]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등 계를 지키는 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갖게 되는 종교적 가치로서의 의미인 것이다. 물론 그 다음 단계로 닦는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마음집중[正定] 등의 선정[] 수행과 이어서 닦는 바른 이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등의 혜[, 위빠사나의 洞察智]의 수행도 도덕적 인격의 완성인 불교윤리적 특성을 띠는 교육적 가치[종교적 가치도 된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길은 통틀어서 도덕적 인격의 완성인 불교윤리적 특성을 띠는 교육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팔정도 가운데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등의 계를 출가 수행자가 방호하는 것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팔정도의 길은 성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압축(凝縮; condensation)과 발현(發顯; representation)의 불교의 교육적 전 개에 대한 이해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대승불교이므로 아무래도 불자들은 대승불교 경전에 익숙한 편이다.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금강경과 천수경 등 경전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절에 가면 법회시 스님과 불자들이 천수경과 반야심경, 그리고 금강경과 아미타경 등을 독송하곤 한다.

대승불교 경전들은 학설에 의하면 반야경의 경우 기원전후 100년경에 인도대륙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반야경은 초기대승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어서 법화경, 아미타경등 경전이 인도대륙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승불교 경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는 경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전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불교교육의 실천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전이 있는 현 상황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모색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와의 관계를 압축(凝縮; condensation)과 발현(發顯; representation)의 관계라고 말하고자 한다. 풀어 설명하면 초기불교의 교설은 압축된 개념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인데 이것이 시대에 따라 교설에 대한 출가수행자 각자의 이해와 문화적, 사회적 배경등에 의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부파불교의 전개] 이어서 대승불교의 교설로서 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이와 같은 압축과 발현의 구조를 눈여겨 볼 필요는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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