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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0/10/23 11:30:45  이한규
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강좌(19)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나타나 있는 교육과정 원리

지난 시간에 끝내지 못한 중론의 교육과정을 마무리 한 후 이번 호에서는 유식사상에 나타나 있는 교육과정의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후대 중국의 선종에서 선사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고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언어와 행동으로 제자들을 제접制接하고 법을 전할 때에도 이와 같은 중론의 무분별(증득의 법)의 분별(가르침의 법)이라고 하는 교육방법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중론의 교육과정시 이루어지는 불교적 교사(출가 비구, 비구니)의 사유와 말은 반야의 분별이 되고, 이런 과정에 의해 무분별인 중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목적에서 정법을 알지 못하므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모든 잘못된 견해인 邪見을 끊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올바르게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中論, T.30, 0001b18, 不知正法. 佛欲斷如是等諸邪見令知佛法故.] 밝히고 있듯이 중론에서 지향하는 불교교육의 목적은 八不의 논리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희론을 멸함’ [中論, T.30, 善滅諸論]으로써 사견을 끊고 종국에 깨달음을 얻는 데 있는 것이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나타나 있는 교육과정과 인간형성(人間形成)

유식사상은 반야의 공 사상이 바탕이 되어 생겨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는 의미이다. 유식사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발표를 하고 완성한 미륵·무착·세친도 중론에서 말하는 있다라고 하는 연생緣生의 개념에 바탕을 두기는 하였다. 그것은 용수에게는 있다는 것이 제법諸法을 뜻하지만 미륵·무착·세친에게는 식(vikalpa)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때 식의 개념은 대상인 경으로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즉 제법諸法의 상이 된다. 반면에 없다라는 것은 용수에게는 연생緣生의 제법諸法이지만 무착·세친에게는 경과 식이다. 이때 대상을 인식하는 식[能緣]이지만 그 대상은 가 된다. 즉 대상은 의타성依他性, 에 의지해 있는 것이므로 없는것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유식무경唯識無境이 되는 것이다. 오직 식만이 있을 뿐 대상인 경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직 식만이 있고, 은 없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왜냐하면 대상이 있으므로 식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의타성, 즉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해 발생하는 식은 대상과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식이라는 점에서 분별分別이라고 하겠고, 진실성은 대상對象인 경과 인식認識하는 식이 모두 양공兩空으로 무분별無分別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식은 무분별이면서 분별이 되는 불이不二의 특성을 띤다.

이처럼 크게 볼 때 반야의 공 사상을 이어받아 성립한 유식사상은 의식의 밑바닥에 아뢰야식이 있다고 설정을 하고, 이 아뢰야식으로부터 자신과 세계가 변현變現한다고 입장을 견지한다. 의식과 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아뢰야식이 자신과 세계에 심리적으로 어떤 관련을 가지며,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유식사상이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유식사상은 대승불교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뒤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아뢰야식이 수행을 통해 맑아지지 않으면 중생의 세계에서 윤회를 거듭하지만 반면에 아뢰야식이 수행을 통해 대원경지처럼 맑아진다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의 교육적 의의는 깨달은 인간으로 형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분기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러면 유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어서 유식사상에서 중요시하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의 의미와 개념들은 유식사상에 나타나 있는 교육과정과 인간형성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달리 표현하면, 유식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로부터 앞으로 살펴보는 유식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교육과정, 즉 커리큘럼의 언어(Curricular Language)가 됨으로써 유식사상의 교육과정으로 성립을 하며, 또한 뒤에 나오는 전의(轉依)의 개념은 유식사상의 인간형성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한다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유식唯識의 원어는 ‘vijnaptimatra’로서, 이때 식’vijnapti‘이다. ’vijnapti‘알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인식의 주체인 식이 자신으로 하여금 인식의 대상인 경(, artha, viaya)를 알게 하는 것, 달리 말하면 식이 구체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식의 원어인 ’vijapti‘는 아비달마논서에서 유래한 말로서 유가행파들은 모든 현상적 존재들은 단지 식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기본적 존재관을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인식활동은 인식하는 인식주관[能緣]과 인식되는 인식대상[所緣]과의 사이에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식에서는 아비달마 논사들이 인식대상이 마음 밖에 실재한다고 본 것과 달리 인식대상은 오직 식의 활동이며, ‘식의 활동에 의해 顯現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인식대상이 식의 활동이고, 이러한 식의 활동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은 인식대상이 영상과 같은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마음에 비추어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원어로 pratibhsa라고 하며, 變似, 似現, 顯現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유식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현상적 존재는 모두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적 존재가 식이라면 유식이 목표로 하는 궁극적 진리는 무엇인가? 유식에서는 무분별지와 진여를 궁극의 진리로 보고 있다. 해심밀경에는 진여를 이언법성離言法性 또는 승의勝義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일체의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초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일체의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유식에서는 이에 대해서 세 가지 자성自性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과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과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이 그것이다. 변계소집자성은 허망분별된 인식대상을 의미하고, 의타기자성은 인연소생으로 성립된 것, 즉 허망분별을 특성을 갖는다. 그리고 원성실자성은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변계소집성은 치우쳐서 계량하고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고, 의타기성은 상대[]를 의지하여 생겨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둥글고 원만하여 비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수행자는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대상을 허망분별한 것, 즉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으로 인식함으로써 대상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으로 부정하고, 이로써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없는 상태인 원성실자성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수행자가 대상인 경계가 허망분별이고, 본래 없는 것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8 인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심··의 심층적 수행과정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아뢰야식은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부파불교까지는 심층식인 8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유식 유가행파만이 안식眼識을 비롯한 여섯 가지 식, 즉 육식六識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식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8식인 아뢰야식이다. 그리고 유가행파는 이 아뢰야식을 자아自我라고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을 두게 됨으로써 전부 여덞 가지 식이 있다고 보았다.

우선 안식으로부터 신식에 이르기까지는 전5前五識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세상에서 보통 오감五感이라고 부르는 식을 가리킨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시각視覺·청각聽覺·취각臭覺·미각味覺·촉각觸覺이 이 오감에 해당한다. 그리고 의식意識6 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5식과 함께 작용을 함으로써 감각을 명료히 하고 지각을 일으킨다. 이 의식은 분별(vikalpa)이라고 하는데,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잘못된 인식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 말나식은 제7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심층심리인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잘못 생각하는 자아의식이다. 원어로는 manas라고 하며, 네 가지 번뇌를 항상 수반하므로 염오식染汚識이라고도 불리운다. 끝으로 아뢰야식은 이상 일곱 가지 식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식으로서 우리의 평상시 의식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심층식深層識이다. 8(第八識)이라고 불리우며, 원어로는 laya-vijna라고 한다. 이 말은 의역意譯하면 장식藏識이라고도 불려진다.

아뢰야식은 유식사상이 학파로서 존립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아뢰야식이 있게 된 것은 윤회의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깨달아 해탈하지 못한다면 3계에서 윤회를 거듭한다. 깨닫지 못해서 윤회한다는 것은 업에 의한 영향으로 인해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업이 소멸되지 않고 어디에 저장되는지 유가행파는 궁금하였다. 아비달마 부파에서는 윤회의 주체에 대해 상좌부와 분별설부에서는 유분식有分識으로, 대중부에서는 근본식根本識으로, 화지부에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으로 부르곤 하였는데, 대승 유식행파에 이르러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뢰야는 근원적인 집착의 대상이다. 아뢰야의 원어인 laya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집착되는 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아뢰야의 또 다른 의미로는 으로 한역되는데,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하므로 일체 종자식種子識으로 불리우기도[藏識으로 불리우기 함] 하는데, 아뢰야식 속에 종자의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여건이 맞으면 씨앗에서 싹이 트듯이 업의 행위의 결과가 나타난다.

아뢰야식의 의미와 기능이 그렇다면 말나식은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살펴보자. 말나식은 자아와 관련된 식으로서 말나末那의 원어는 manas로서 man(생각하다)의 명사형이다. 이것은 사량思量으로 변역되는데,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가리킨다. 6(六識)과 구별하여 말나 또는 말나식 또는 제7 말나라고 한다.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함께 과거 전생으로부터 생사 윤회하면서 항상 활동을 해 왔다고 하며, 그 특징은 첫째,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 둘째,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한다. 셋째, 항상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말나식은 자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강렬하고 집요하게 자신에 대한 집착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심층적이고 강렬하고 집요한 제 7 말나식이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말나식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아서 파악되기 어려운 내면의 深層識인 아뢰야식이다.좬유가론좭제51권에서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이것이 자아라고 집착한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나식은 항상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등 네 가지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데, 이와 같이 함께 일어나는 것은 상응相應이라고 불려진다. 이 네 가지 번뇌인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은 중심적인 마음인 심왕心王에 따르게 되므로 심소心所(心所有法, citta)라고 한다. 우선 아치我癡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아치란 자아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좬성유식론좭에서는 아치는 무명無明이다. 나의 참 모습에 어두워 무아의 이치를 모른다. 그러므로 아치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중생이 오랜 세월동안 생사 윤회를 하는 것은 무명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식 유가행파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생사 윤회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일까 깊이 궁구한 끝에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가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 내게 되었으며, 7식과 상응하는 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다음은 아견我見(tmadi)으로서 자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아견은 살가야견薩迦耶見(有身見, satkya-di)이라고도 불려진다.좬성유식론좭에서는 아견은 아집이다. 자아가 아닌 법을 망령되게 분별해서 자아로 삼는다. 그러므로 아견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자아가 아닌 법이란 5취온(五取蘊, 다섯 가지 요소. ····)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생이 이 5취온에 집착을 해서 나와 나의 소유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아만我慢이다.좬성유식론좭에서는 아만에 대해 아만은 거만이다. 집착된 자아를 믿어서 교만하다. 그러므로 아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견에 의해 자아를 자신이라고 집착함으로써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고 뽐내는 것을 말한다. ‘(mna)’은 탐 진 치 만 의 등 여섯 가지 근본 번뇌 가운데 하나로서 마음의 높이는 것(unnati)이다. 원어인 ‘unnati’는 어근語根un-nam(일으키다)으로서 자기를 높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만하게 뽐내는 마음으로서 악한 마음에 해당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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