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3.3.25 (토)
 http://www.bulgyonews.co.kr/news/37370
발행일시: 2023/02/20 16:58:35  이한규
배길몽 작가의 상식 뒤집기(19)
19. 왜 나는 행복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스님들이 주장하는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타당성이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불교가 주장하는 무아와 연기 이론에 의하면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며 인연에 의해서 생성 소멸하는 것이므로 마음의 생성과 소멸도 또한 예외가 아니어야 한다. 마음도 실체가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고 환경(인연)의 산물에 불과해야 무아와 연기 이론에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환경이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다시 환경을 조작하는 일체유심조의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종교적인 수행도 시작할 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하지만 결국 깨달아서 올바른 마음을 갖기 위한 것이며 올바른 마음을 가지려면 마음을 일으키는 자신의 환경을 올바르게 가꾸어야 한다. 그런데 주변 환경을 올바르게 가꾸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드니 차라리 내 자신이라도 바뀌려고 노력하는 것이 결국 수행이다. 수행이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환경(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주어진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수행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체념 즉 현실 도피의 일종이다. 그런데 필자가 지난 연재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므로 위대한 존재인 인간은 체념하면서 사는 현실 도피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 개혁을 해야 한다.

 

불교 신자들은 대부분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체념(양보, 자비)하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불교 국가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면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과거에 어떤 국제기관에서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부탄이라는 후진국이 전 세계에서 1위를 했다. 그런데 부탄에 인터넷이 들어가서 그들도 바깥세상을 알게 되고나서 다시 행복지수를 조사했더니 100위권으로 물러났다. 행복하다는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자기최면에 의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열반적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욕심을 버리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행복해지려는 욕심도 버려야 한다. 그런 식이라면 해탈하려는 욕심마저도 버려야 하므로 모든 욕심을 버리면 해탈도 할 수 없다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다. 대부분의 종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제시해서 인간을 그 목표의 노예로 만든다. 그래야 신도들이 끊임없이 종교에 복종하면서 시주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목표에 도달해서 해탈해버리면 시주는 누가하고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이제 종교, 철학, 과학은 모두 합심해서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 위에서 올바른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왜 사람이 사람을 추종하는가? 그렇다고 신을 추종하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라. 필자는 오직 진리만을 추종하라고 권고한다. 신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어리석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만든 피조물(허상, 우상)에 불과하다. 지도자들이 무력으로 대중을 일시적으로 지배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한계가 있고 그래서 신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직자들이 교주의 이름을 팔아서 호의호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식 종교가 태동하기 이전의 원시시대에는 모두 제정일치시대였고 그래서 무당들이 정치지도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지도자가 자신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므로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지 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무력으로 지도자를 제압할 수 있어도 신에게 저주를 받게 된다고 공갈을 쳐서 반역을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무당이 세계 10대 선진국 안에 있는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실제로 신은 없는데 무당이 어떻게 신통력을 발휘하는지 궁금하면 필자가 저술한 '얼굴이 밝은 성직자는 가짜다'라는 책을 보기 바란다.

 

기본적으로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종교도 인간이 영원해지려는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인간은 부모의 욕망에 의해서 태어나고 다시 자신의 욕망으로 종교를 만들거나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가 신도들에게 욕망을 없애라고 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가식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정당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해야한다.

 

이름만 대면 불자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어떤 유명한 스님이 윤회와 해탈에 대해서 설법을 하면서 윤회는 종교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우회적으로 종교적인 윤회를 부정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그분의 식견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분은 고()와 락()이 같은 뿌리인 욕()에서 나왔으므로 욕을 없애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고도 함께 없앰으로써 고락의 윤회를 벗어나 적정(고락의 파도가 없는 고요함)에 이르는 것이 해탈(열반)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우주와 생명의 작동 원리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고와 락의 본질을 아직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고를 없애기 위해서 락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체의 삶이 아니라 물질의 작동에 불과하게 된다. 고통이나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그것이 돌덩어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결국 수행은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돌덩어리가 되거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이 되기 위해서 한다는 것인가?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생(안정)이나 불교가 추구하는 해탈(자유)이 종교의 목표로 보이지만 실제로 실현할 수 없는 목표는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며 행복을 느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단을 위해서 진정한 목표인 행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내세의 영생(해탈)을 위해서 현실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생일 잘 먹으려고 이레를 굶다가 죽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행복의 속성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인과 법칙과 유사한 법칙이 물리학에도 있는데 그것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그 용어만 들으면 마치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고 작용이 있으니까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살펴보면, 두 물체가 충돌(접촉)하면 서로 상대에게 힘을 가해서 충격이나 영향을 동시에 주므로 거기에는 충돌이라는 사건이 있을 뿐 원인과 결과 혹은 작용과 반작용의 구별은 없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다시 쉽게 설명해보겠다. 만약에 이라는 자동차가 규정대로 가고 있는데 이라는 자동차가 뒤에서 과속하다가 충돌했다면 교통법상으로는 이 가해자다. 그런데 교통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우주의 법칙에는 교통법은 없으므로 가해자와 피해자는 구분은 없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갑이 을에게 충돌한 것이 아니라 을이 갑의 길을 가로막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에서 모든 상대는 작용이며 동시에 반작용이고,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이고, 가해자며 동시에 피해자가 되므로 거기에 선후나 우열의 구분은 없어진다. 만약에 부드러운 생명체와 단단한 물체가 충돌하면 생명체가 손상을 더 많이 입게 되지만 그것은 생명체의 입장일 뿐이고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약한 것과 강한 것이 충돌하면 약한 것이 더 많이 손상을 입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우주의 순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는 강자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와 같이 인간관계에서도 고(슬픔)와 락(기쁨)이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처럼 언제나 짝으로 일어난다. 서로 충돌하는 상대의 락은 나의 고이고 나의 고는 상대의 락이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나의 합격은 떨어진 사람의 고이고 나의 질병은 의사의 락이다. 그래서 우주는 결국 제로섬이며 어차피 나의 락과 상대의 고의 합이 제로라면 열심히 노력해서 나는 나의 락을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며 내가 굳이 나를 희생해서 상대의 락을 증가시켜줄 필요는 없다. 의사의 수입()을 위해서 내가 병을 앓는 것이 타당하거나 합리적인 일일 수 있겠는가? 우주가 제로섬이라면 기왕이면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는 정당한 것이다.

 

인간에게 행복(즐거움)이 없다면 돌멩이와 같으며 생존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의 행복을 해쳐도 될까? 그 질문의 대답은 안타깝지만 예스다. 다만 해칠 때 정당성이 성립돼야 한다. 강도가 들어왔을 때 해칠 수 있듯이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를 해치면 그것은 정당방위가 성립된다. 그래서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정당하다. 안 그러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도축장에서 도살은 직업으로서 살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지만 취미로 사냥을 하면 관청의 허가를 받아도 종교적으로 보면 살생에 해당되며 역으로 산짐승이 사냥꾼을 해치면 그것은 정당방위에 해당된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영역을 지킬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힘이나 조직 혹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이 무상의 변화 속에서 결국 무아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 무상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생명은) 행복할 필요와 권리가 있다. 행복이 없다면 인간은 사물과 같아진다. 다만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지나치게 행복한 것은 정당함을 잃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지나치게 행복하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행복은 건강에서 시작되고 건강은 치아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기존의 치의학 이론에 오류가 많아서 그 이론으로 만든 치약은 효과가 거의 없고 치주 질환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필자가 야생동물은 평생 치석과 치주질환이 없는 이유를 연구해서 칫솔이 필요 없는 신개념 치약을 만들었다. 이 치약을 사용하면 잇몸이 야생동물처럼 강해져서 평생 치석과 치주질환이 발생하지 않으며 잇몸통증과 시린 이가 사라지고 코골이와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므로 잇몸이 약한 사람은 사용해볼 것을 권장한다. 치아가 무너지면 맛있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세균이 침투해서 전신 건강이 무너지므로 미리 대비해야 한다.

 

공지사항

필자가 개발한 치약을 구매한 일부 소비자들이 사용법을 정확하게 읽어보지 않고 일반 치약처럼 사용해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길몽웰빙치약은 일반 치약과 사용법이 전혀 다르므로 치약을 구매한 분은 판매처에서 제시하는 사용법을 꼭 읽고 정확하게 사용하기 바랍니다.


▲배길몽 작가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l   신문사 소개   l   연혁   l   조직구성   l   본사 및 지사 연락처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  
copyrightⓒ2001 주간불교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30길 21, 1415호(낙원동, 종로오피스텔)
편집국·업무국 02)734-0777 Fax : 02)734-0779
주간불교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