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나 철학 및 종교는 그것의 옳고 그름보다 그것이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과학은 진실일지라도 인간을 파괴할 수 있고 종교는 거짓일지라도 이간에게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뉴턴의 만유인력을 바탕으로 이룩된 고전역학으로 태양계 안의 모든 현상을 무리 없이 잘 설명했다. 그런데 태양계 밖의 거대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 모순이 생기므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제시해서 그 모순을 나름대로 극복했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작은 세계로 들어가 보니 또 만유인력이나 상대성이론과는 무관한 현상이 나타나므로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을 개발했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의 문제점은 나중에 개발된 이론들이 먼저 나온 이론으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창조된 독립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모순은 중첩과 얽힘이다. 중첩은 하나의 양자가 동시에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얽힘은 두 개의 양자가 거리에 상관없이 언제나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얽힘은 불교의 연기론이나 인과론과 비슷하고 양자 역학의 중첩은 불교의 중도 사상이나 중관사상과 매유 유사하므로 이점에 착안해서 일부 불교학자들이 불교가 매우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학에 오류가 있다면 불교가 매우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양자역학은 모순투성이다. 아직 과학은 진화중이고 미완성인데 이미 완성된 진리라고 인식되고 있는 불교와 미완성인 과학을 섣불리 동질화해서는 안 된다.
양자역학은 오류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무엇을 측정하려면 그 측정 수단이 측정하려고 하는 대상보다 더 정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물체의 크기나 무게 혹은 상태를 측정하려면 그 물체보다 작은 단위의 측정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1센티 그물코를 가진 그물로는 1센티 이하의 물고기는 잡을 수 없는 것처럼 1센티 눈금을 가진 자로는 1센티 이하의 물건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다. 양자의 상태를 측정하는 수단이 같은 양자이며 게다가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양자를 에너지가 훨씬 많은 운동하는 양자로 측정하므로 측정하려고 하는 순간에 이미 그 정지한 양자의 상태는 바뀌어버리므로 정지한 양자의 상태는 절대로 정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양자가 집단적으로 뭉쳐 있다면 그 상태가 변하지 않도록 측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류 현상이다.
일반 가정에 공급되는 220볼트 단상전류에서 두 전선(활선과 중성선)에 흐르는 전류와 저항의 크기는 같은데 흐르는 전류의 성질이 전혀 다르다. 활선에서는 전압강하가 일어나고 중성선에서는 전압강하가 일어나지 않는다. 활선을 접지하면 쇼트가 일어나는데 중성선은 접지해도 쇼트가 일어나지 않는다. 활선을 절단하면 전류가 흐르지 않지만 중성선을 절단하고 접지하면 활선 하나만으로도 전류가 흐른다. 만약에 단상 전류가 전기공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류라면 두 선에 흐르는 전류의 성질이 같아야 하는데 왜 다른가? 그리고 중성선에서 전압이 없어도 전기의 기본 법칙인 옴의 법칙(V=I*R)을 무시하고 전류가 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이유는 활선과 중성선에 있는 전자(양자)의 에너지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며 단상 전류에 흐르는 전류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류가 아니라 직류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전자가 중첩 현상에 의해서 동시에 두 가지 에너지 상태(중첩 현상)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활성선의 전자는 저항을 지나가는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저항에게 부여하고 자신은 에너지가 없는 상태로 바뀌면서 중성선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중성선의 전류에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며 전자가 동시에 두 가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활선의 전자와 중성선의 전자는 거리가 멀어서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같은 선에 존재하는 이웃하는 전자는 서로 얽혀 있어서 활선에 있는 전자 모두가 에너지를 가지고 있거나 반대로 중성선의 전자처럼 모두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활선의 집단 속에서는 전자 하나가 홀로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없고 반대로 에너지가 없는 중성선의 집단 속에서는 전자 하나가 홀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양자의 동시 중첩이나 먼 거리에서 얽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불교가 주장하는 인과나 연기는 양자역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먼 거리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옷깃을 스치는 가까운 거리에 도달해야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랑이도 멀리 있으면 무섭지 않고 오직 가까이 있을 때만 위협이 되고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혹자는 부모나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부모나 친구는 자기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스스로 자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그들이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처럼 모든 것은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의식은 자신의 뇌 속에 축적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양자역학의 중첩 현상처럼 선과 악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즉 욕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욕심이 상황과 입장 차이에 의해서 때로는 악으로 보이고 때로는 선으로 보일 뿐이다. 선과 악의 구분은 원래 존재하지 않은 것이며 인간이 편의상 분류해놓은 관념에 불과하다. 사슴에게 뜯어 먹히는 풀의 입장에서 보면 사슴은 자기를 괴롭히는 악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그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오히려 자기편이며 선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의 구분은 없고 오직 연기 작용만 있는 것이며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편과 남의 편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을 줄이고 세상을 화평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목표다. 불교의 기본 이론이 무아, 무상, 연기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주에 무슨 선과 악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저 무아의 상태에서 연기 작용으로 인하여 한 없이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 악과 선이 뒤바뀌고 강자와 약자도 서로 위치가 바뀌면서 우주는 순환(윤회)할 뿐이다.
배길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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