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삶의 좌표로 내걸고 세상을 밝히고 있는 문사수법회가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문사수법회 중앙전법원이 7월 17일로 개원 22주년을 맞았다. 이는 어느 한 단체를 넘어 불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개원 22주년을 맞은 문사수법회의 대표법사인 여여 김태영법사를 만나 법회의 현실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
| 법문중인 여여 김태영 문사수법회 대표법사 |
▲먼저 문사수법회 개원 22주년을 축하한다. 짧은 기간에 법회가 본괘도에 오른 모습을 보니 놀랍다. 법회때마다 법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여여 = 불교계가 어디든 열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행생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법회 현장을 살펴보면, 낙관만 하기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다. 바람직한 면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만약 방해하는 요인이 있다면 과감하게 개선이나 폐기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실로 불교는 허공에 뜬 관념이나 학문적인 호기심의 대상에 머무는 게 아니고, 삶의 중심으로 부처님을 모시는 생명의 약진이 있어야 한다.
 |
| 문사수법회의 담양정진원 |
▲그럼 법회현장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시도들을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여여 = 참으로 불교에서 삶의 의미를 물으려고 한다면, 부처님으로부터 이어져온 물음의 전통에 충실해야 한다. 어줍지 않은 지식이나 경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상태에서 출발한 물음을 잃지 않는 불교여야 한다.
▲물음을 잃지 않는 불교의 전통을 보다 상세히 말해달라.
여여 = 아쉽게도 논의의 대부분은 “어떻게?”의 범주에서 맴돌기만 한다. 삶의 근원으로부터 제기되는 “왜?”와 궁극으로 향하는 “무엇?”에 대한 물음은 마치 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사람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식의 신행생활이 일반화된 듯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치열한 구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근원적인 물음에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진정한 의미를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
| 문사수법회의 중앙전법원 |
▲그럼 문사수법회에서는 무엇을 믿고 실현하며, 어떻게 법회를 진행하고 있는가?
여여 = 문사수의 법우(法友)들은 자신의 삶이 과거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요,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꿈도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의지해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삶의 근원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는 곧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은, 우리의 삶이 보다 살만한 가치를 갖도록 인도하는 데 있음을 의심치 않는데서 말미암는다. 때문에 스스로 잘못된 생각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모순에 잠겨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참생명을 구현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완전한 성취가 항상 기다리고 있음을 믿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삶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복중의 최고일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의지해서
부처님 생명을 삶의 근원으로 삼고
삶이 살만한 가치 있음을 의심않고
얻은 참생명은 믿음의 당연한 결실
성취의 기쁨 누리는게 최고 복이다
▲법우라는 표현을 쓰는데, 법우는 법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하고 있는지요? 흔히 승속(僧俗)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사뭇 낯설게 느껴진다.
여여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물음의 전통에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온 게 불교의 역사이다. 이것이 사자상승이며 묻고 답하는 구도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성과 속으로 나누는 다른 종교와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둘 사이를 잇는 매개자로서의 성직자 또한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다만 구도자들이 서로 법을 공양하는 문에 들어가서 모이니, 법회라고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법회에서는 이분법으로 나뉠 새가 없다. 다만 법문을 듣고 배운 그대로를 익히는 법우가 법회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거지로 드러내면 그만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삶의 키를 삼는 사람이라면, 그가 자리한 곳이 여래가 계신 곳이다. 또한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옷을 입건 관계없이 여래의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
| 문사수법회의 대전전법원 |
▲그렇다면 단순히 일요일마다 열리는 정기법회만으로는 다양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지 않은가?
여여 = 그렇다. 삶의 모든 영역마다 일일이 답을 주려는 시도는 오히려 향상심을 퇴색시킨다. 근본이 명확하면 어떤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법회에서는 경전학당을 개설하고 있다. 단순히 경전에 대한 지식이나 교양을 충족시키려는 게 아니다. 번뇌 즉 깨달음[菩提]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생활이라는 도량 한가운데에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을 위한 불교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불교로부터 비롯된 생활을 살려는 것이다.
 |
| 문사수법회 불자들의 경전학당 |
▲경전학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나요?
여여 = 당연하다. 요즘은 <금강경 법문>을 듣고 있는데, 모든 동참자는 몇 가지만 동의하면 된다. 그 가운데 특히 전원이 점검에 참여해야 합니다. 명목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교를 온전한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회에 참석하는 법우는 익명으로 치부되는 그런 막연한 대중이 아니다. 각자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사람의 불자여야 한다. 법화경에 따르면, 불자란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자신의 참된 존재가 무엇인가를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어, 새로이 태어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공유하는 수준에 머무는 구경꾼이 아니다. 여시아문의 주인공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공명하여 현실에 드러내는 여래사(如來使)로 사는 것이다. 그만큼 원칙과 자신의 삶이 얼마만큼 긴장관계를 갖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교리로 무장하고 전문 학자도 알쏭달쏭해 하는 개념을 마치 보통명사나 되는 듯이 내뱉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누가 어려워서 불교 근처에 얼씬이라도 하겠는가. 형식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고정된 불교가 존재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여여 = 부처님께서 시장언어로 설법하셨다는 것은 공공연한 상식이다. 말 그대로 일반인들의 언어생활 수준에 눈높이를 맞췄다. 이는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진리가 드러남에 있어서는 시대의 옷을 걸친다는 점이다. 또한 진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타당해야 한다는 명제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도심에 의해서 결판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형화된 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경전학당에서는 여시아문에 따르는 점검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렇게 구도자들인 법우들이 모여 법회를 이루고, 법문을 들으며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을 만나고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여여 = 저희 법회는 중앙전법원과 대전전법원 그리고 담양정진원이 있다. 쉬지 않고 일요법회와 법담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보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법회의 얼굴을 가지고 종횡으로 전개할 것이다. 오늘을 기꺼워하고 있기에는, 시대의 업풍이 만만치 않다. 미신을 정신(正信)으로 사법(邪法)을 정법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 둘이겠는가?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다른 것을 봄으로써 봄이 성립된다. 법회가 보다 많은 눈과 귀에 다가가야 하는 존재이유다. 그래서 만나는 인연마다, 보고 듣기를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게 하여야 한다. 어제의 발자취가 내일의 길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명의 요구가 전법이다. 그러니 법회운동에 이미 동참했거나 앞으로 동참할 인연들에게 어찌 감사와 찬탄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