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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15/09/24 02:47:26  한기선
그림 속의 떡이 배부르랴!_見牛견우
깨달음의 길 尋牛圖 (3)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여섯 기관의 문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네.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물 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인데,
눈썹을 치켜뜨고 바라봐도, 별 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조화로운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다시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견우(見牛)’는 이른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단계를 상징합니다. 즉, 소(牛)로 비유되는 마음자리를 힐끗 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불법을 닦는 사람들 중에는 이 견우(見牛)의 단계에서 퇴타심(退墮心)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는 유위법(有爲法)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결코 목적격이 될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깨달음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견우(見牛)에서 이 ‘견(見)’자(字)는 ‘볼 견’이기도 하지만, ‘드러날 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의미를 새긴다면, ‘견우’로 읽는 것보다 ‘현우’로 읽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牛)로 상징되는 진리는 특별한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때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를 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우리가 밝아진 눈으로 봤을 때 본래부터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어왔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의 울음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 기관이란 육근(六根)을 말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으로서 각각 안근(眼根)[눈]ㆍ이근(耳根)[귀]ㆍ비근(鼻根)[코]ㆍ설근(舌根)[혀]ㆍ신근(身根)[몸]ㆍ의근(意根)[생각,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육근은 내가 내 밖의 세계를 만나고 받아들이는 통로의 역할을 합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항상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육근을 개방하면 되기에 여섯 기관의 문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動靜]하는 모든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진리의 바탕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란, 내가 있는 곳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곳에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물 속의 소금처럼, 물감 속의 아교처럼 처음부터 언제 어디서든 나와 하나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리 눈썹을 치켜뜨고 바라본들, 별다른 물건이 아닌 것입니다.

 

  게송에서,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조화로운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는 것은 세상 그대로가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 따로 특별히 추구할 무엇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특별한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南無)입니다.

 

  게송의 그 다음 구절에서는 이를 아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무엇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헛되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여, 앞에서 말한대로 별 다른 물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숨은 소(牛)를 찾는다고 하지만, 사실 소는 처음부터 숨은 적이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밝지 않았기에 소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라고 하는 나의 근원적인 마음자리는 내가 처한 상황을 떠나 특별한 때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부터 눈이 어두워져서 본래부터 있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부처되겠다는 마음은 가상할지 몰라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생각은 나의 진정한 생명가치의 실현을 그냥 가능성의 상태로만 남겨두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나’가 있는 한, 그 위풍당당한 쇠뿔을 그리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착각 중 하나는 부처 아닌 자가 열심히 수행해서 부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부처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래 부처였는데 이를 모르고 지내다가 본래부터 부처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부처를 이루시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보리수 아래에 앉은 수행자 싯달타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맞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싯달타에게 진리가 드러난 것입니다. 보리수 아래에 앉은 수행자 싯달타는 ‘나’가 하고자 하는 일체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다시 말해 나무(南無)함으로써 본래의 생명가치를 그대로 온전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나무(南無)하여 부처를 이루신 것입니다.

 

* 본 강좌의 육성 법문을 팟캐스트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육성 법문 듣기]
팟캐스트 ‘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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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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