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생각도 뒤따르나니,
깨달음을 인해 진실을 이루기도 하며,
미혹으로 인해 거짓이 되기도 한다.
경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분별하여 헤아림을 용납치 않는다.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두렵구나!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봐.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이 ‘목우(牧牛)’ 장면은 붙잡은 소를 길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牛)로 상징되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반드시 이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를 얻은 ‘득우(得牛)’의 바로 뒤에 이 ‘목우(牧牛)’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 앞의 ‘득우(得牛)’ 장면을 보면, 그토록 바라던 소를 얻었지만 습기(習氣)라는 야성이 남아있는 소를 아직은 제대로 부릴 수 없기에 계속 채찍질을 더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우(牧牛)’에서의 수행은 붙잡히고도 여전히 날뛰는 소를 때리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길들이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앞의 ‘득우(得牛)’의 단계는 단지 자기의 참생명자리를 조금 엿볼 수 있게 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참된 생명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일 따름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기에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우(牧牛)’에서는 붙잡은 소에 채찍질을 더하고, 고삐를 더 바짝 죄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우(牧牛)’에서 말하고 있는 수행은 결코 정적(靜的)인 수행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수행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조용한 산 속과 같은 특별한 곳에 틀어박혀서 닦는 수행이 아니라, 분주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수행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를 제쳐두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그러면서 때로는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이러한 온갖 일상을 떠나지 않는 곳에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앞서 ‘견우(見牛)’ 장면에서 살펴보았듯이 소(牛)로 상징되는 진리는 특별한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때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를 보지 못하다가 우리가 밝아진 눈으로 봤을 때 비로소 본래부터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어왔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증명되는 곳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지금’ ‘여기’를 떠나지 않는 일상입니다. 온갖 경계에 부딪치며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부침을 겪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 만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생명답게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경계든지 기꺼이 맞을 줄 알아야 합니다.
경계를 만났다는 것은 ‘나’가 설정해 놓은 ‘내 식’의 범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 만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됩니다. 경계를 만나야 ‘나’를 내세우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득우단계는 참 생명을 보게된 자리이다
다음단계인 목우는 소를 길들이는 것이니
채찍질을 하고, 고삐를 바짝 죄어야 한다
여기서의 수행은 정적이 아닌 동적인 수행
습(習)이란 ‘나’에게 익숙하고 고착화된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 습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게 작동하기도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은밀하면서도 끈질기게 작동할 때가 더 많습니다. 자기가 어떤 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다가 경계를 만났을 때 비로소 습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므로, 경계 만나는 때야말로 ‘나’를 포기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뒷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처럼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데, 이는 ‘내 식’의 잣대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의 아들을 보며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다가, 옆집 아들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신경질을 내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자기의 아들은 적어도 옆집 아들보다는 공부를 잘 해야 된다는 ‘내 식’의 기준이 앞서는 한,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생각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 식’의 기준을 설정해 놓은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싹틀 수밖에 없는데, 목우에서 놓치지 않아야 될 것이 바로 익숙한 ‘내 식’의 무엇을 추구하는 끈질기고도 은밀한 습(習)의 작용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이 ‘내 식’의 추구를 포기하면 깨달음의 진실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고, 이를 계속 고집하면 미혹으로 인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경계를 만났다는 것은 ‘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만났다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경계로 다가왔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내세우는 원인을 지었기에 상대대립(相對對立)이라는 결과가 펼쳐진 것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만났다는 것은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익숙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는 것, 즉 습(習)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한 수행의 고삐를 계속 바짝 조여야 됩니다. ‘내 식’의 잣대를 들이대며 분별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용납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게송에서는 소(牛)라고 하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소를 붙잡아 놓기는 했지만, 아직 야성이 남아있는지라 언제 다시 제멋대로 티끌세계에 들어가 버릴까봐 두렵기 때문에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야성이 남아있는 소와 같이 아직 습(習)에 젖어 있는 마음은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의 채찍질을 더하고 정진의 고삐를 더 조일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경계를 만났을 때 경계를 잘 알아채서 경계에 끄달리거나 경계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채찍질을 가하고, 얼러주는 것이 필요할 때는 살살 고삐를 당겨주어야 됩니다. 이렇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잘 길들이면 소로 상징되는 마음은 온순하게 될 것입니다.
‘득우(得牛)’를 했으면, 반드시 ‘목우(牧牛)’를 해야 됩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소를 손에 넣은 ‘득우(得牛)’의 단계에서 수행이 멈추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코 목적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한 것이 있다면 이를 숙성시키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이 숙성시켜서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으로서, 바로 ‘목우(牧牛)’ 단계에서의 공부입니다.
이러한 공부를 일러 불가(佛家)에서는 ‘성태장양(聖胎長養)’이라고 합니다. ‘성스러운 것을 태아처럼 태속에 넣고 키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성태장양하지 않은 공부는 진정 자기 것으로 소화된 공부일 수 없습니다. 약간의 성과가 있다고 해도 결코 방일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긴장감을 가지고 채찍과 고삐를 거두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육성 법문 듣기]
팟캐스트 ‘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www.podbbang.com/ch/5845
-스마트폰 : play스토어> ‘팟빵’앱 설치>검색창에 ‘여여’ 입력>‘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선택
현재 심우도, 육조단경, 금강경, 반야심경 방송 중
문사수법회 www.munsasu.org 031-966-3581
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대중법회 _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경전학당 _‘성불成佛의 삶, 행원行願의 힘’
[중앙]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 저녁8시
[대전] 매주 목요일 저녁8시
*정진원 專修念佛(전수염불) _매월 넷째주 토요일 오후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