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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15/11/10 11:07:01  한기선
거침없이 산다 _騎牛歸家기우귀가
깨달음의 길 尋牛圖 (6)

싸움이 끝나고 나니, 얻음도 잃음도 모두 공(空)이로구나!
나무꾼의 시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이들의 풀피리를 불어 보노라.
태평한 모습으로 소 등에 누워,
눈은 구름 위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당겨도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놀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기우귀가(騎牛歸嫁)’부터는 이전의 장면들보다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장면부터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우리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들을 통해 공부하는 내용은 구체적인 내 삶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우귀가’부터는 심우도(尋牛圖)에 관한 공부가 자칫 관념적 유희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기에 조심스럽게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기우귀가(騎牛歸嫁)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더이상 상대유한(相對有限)의 세계를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상대유한의 ‘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울러, ‘나’를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이러저러한 조건을 충족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몇 평짜리 정도의 집에서는 살아야 한다거나, 승용차를 굴리려면 적어도 얼마짜리 정도는 되어야 한다거나, 또한 자식을 반드시 판ㆍ검사나 의사로 만들어야 한다거나…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건을 앞세우며 사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설령 힘들게 조건을 충족했다고 해도 그로 인한 만족은 일시적인 것일 뿐, 또 다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끝없이 번뇌 속을 해매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결코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조건을 맘껏 쓰면서 사는 것이 본래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지금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나중에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지, 행복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 무한세계는 부처님 생명이 실현된 곳이다.

조건 충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음자리는 결국 나와의 긴 싸움이다.

 

  이 ‘기우귀가’의 단계는 조건충족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단계입니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소가 이끄는 대로 맡긴다는 것이기에 더 이상 어떤 무엇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조건충족을 추구했던 상대유한의 ‘나’를 버리고, 본래부터 모든 공덕을 구족한 참생명을 드러내며 사는 삶을 나타냅니다.

 

  습(習)이라는 야성(野性)이 남아있던 소와의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고, 더 이상 ‘내 식’의 무엇을 내세우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끝장으로 인하여 ‘나’로부터 시작된 상대유한의 세계가 끝장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상대유한세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대로 절대무한세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상대유한세계를 떠난 절대무한세계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무한세계는 오직 절대무한 그 자체이기에 본래 절대무한세계만 있을 따름이지만, ‘나’를 내세우는데 익숙한 나머지 상대유한세계를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나’가 없어지면 본래 있던 절대무한세계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 절대무한세계가 바로 우리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실현된 세계입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가치는 절대무한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 표현되는 모습에는 그 어떤 제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에 대해서 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규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이를 일러 ‘공(空)’이라고 하는데, 공(空)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허무함을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고 한정지을 수 없는 무한가능성 그 자체를 일러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소(牛)라고 하는 마음자리를 다스리고자 하는 싸움은 결국 ‘나’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통해 상대유한의 ‘나’가 없어지면 그 자리에 본래부터 절대무한의 참생명이 있어왔음이 드러나게 되고, 이러한 근원적 생명자리에서 보면 새삼스럽게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공(空)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제한이나 한정이 있을 수 없기에 나무꾼의 시골노래나 아이들의 풀피리와 같이 어설프게 들리는 소리일지라도 이로써 충분히 참생명을 표현하는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본성은 꿈틀대고 펄떡이는 역동성입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이러한 생명활동은 잠시도 멈춤이 없기에, 우리의 생명은 계속 성장할 따름입니다. 소 등에 누워 눈은 구름 위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처럼 근원적 생명자리에서 약속되어 있는 무한성장과 무한성취를 의미합니다.

 

  익숙했던 ‘나’의 범주에서는 결코 생명이 생명답게 성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테두리가 무너질 때 세상과의 교류에 의하여 살려지고 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무한의 생명가치는 더 이상 ‘나’를 고집하지 않을 때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참된 생명가치에 대해 눈뜬 사람은 무한한 성취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순간순간 다가오는 인연 속에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임을 확인하고,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었음에 감사하며, 무한공덕의 주인자리를 누리기만도 벅찰 따름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당겨도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르고 끌어당기는 것은 내 밖의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자기의 습(習)이요, 자기의 과거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생각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과거 속으로 가두어버리는 우(愚)를 범하곤 합니다. 생각이란 과거의 경험, 지식 등에 터 잡을 수밖에 없기에, 생각이 많다는 것은 철저히 과거에 충실하다는 말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이미 결정되고 굳어져 버린 과거를 무한히 살아 약동하는 현재의 생명 앞에 들이댄다는 시도 자체가 처음부터 가당치도 않은 것입니다.

 

  게송(偈頌)에서 말하는 ‘오랑캐 피리소리’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상대의 세계를 깨버린 절대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았기에 오랑캐의 피리라고 한 것인데, 이는 중국식의 피리연주 형식을 깨버린 파격의 피리연주라는 뜻으로서, 고정되고 익숙한 범주를 고집하는 상대의 세계가 아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립하지 않는 절대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놀에 실려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조화된 세계를 뜻합니다. 특별히 구하는 무엇이 없기에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연주를 알아주는 친구인 ‘백아’가 죽었다고 해서 두 번 다시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종자기’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하는 ‘知音(곡조 아는 이)’은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백아’라는 조건충족을 위해서만 연주를 했던 종자기의 연주는 제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 해도 상대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격식에 맞지 않아 다소 엉성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연주하는 오랑캐의 피리연주야말로 어떤 조건도 전제하지 않는 절대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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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1건)
불교가 불자님들이 정신차려야 된다 말도 안되는 욕이나 먹고 뭐하는 짓인가 ??? 불교가 인류 희망이다  l  2015.11.18
불교가 불자님들이 정신차려야 된다 말도 안되는 욕이나 먹고 뭐하는 짓인가

불교가 불교 믿는 나라가 개독한테 거지라는 말도 안되는 욕이나 먹으면 안된다

우리나리도 유명한 불자 경영인도 많다

참고로 일본은 불교를 믿는 나라중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입니다

일본 아베도 불교 공부를 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 일본 아베하는짓이 임진왜란 배후 예수회와 비슷하다

가난한 대한민국을 경제를 살린 박정희 대통령도 이병철 회장님도 애플 스티브 잡스도 불자 입니다

정주영회장님 부부 천도재도 북한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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