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에는 두 법이 없나니, 소에 의탁해 종(宗)으로 삼았노라.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과 같고,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한 줄기 차가운 빛은 밖의 위음(威音)이로다.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소도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띠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이 「망우존인(忘牛存人)」부터 이후의 장면들에는 더 이상 소(牛)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로 상징되는 ‘진리’와 그 진리를 찾는 ‘나’가 서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따로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는 우리의 일상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특별한 어떤 것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첫 구절에 ‘법(法)에는 두 법이 없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법에는 ‘진리인 법’과 ‘진리 아닌 법’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접할 수 있는 특별한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무한히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심우도(尋牛圖)의 맨 첫 장면인 「심우(尋牛)」는 소를 찾기 위해 고향집으로부터 나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을 돌아보며 화자(話者) 는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심우’의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이미 찾고 나서 돌아보는 입장에서는 애초에 잃을 것도 없고 새삼스레 찾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밖으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심우」「견적」「견우」「득우」「목우」「기우귀가」를 거쳐오면서, 소(牛)라고 하는 진리는 특별한 때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때와 장소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와 그 진리를 추구하는 ‘나’가 대립하고 있었지만, 법(法)에는 두 법이 없음을 체득했기에 목적격으로 추구해 온 진리(소)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는 잊고 사람만 혼자 있는 것입니다.
소를 찾아 나섰을 때도 혼자였고, 소를 타고 돌아와서도 혼자이지만, 그 생명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소를 찾았기에 더 이상 소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토끼를 잡은 후엔 더 이상 올가미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고기를 잡은 후엔 더 이상 통발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 왜 살지?’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물음이 절실한 사람은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 자기 삶의 주인임을 증명하고자 답을 찾아 나섭니다.
처음에는 깨쳐서 부처가 되고자 구도의 길을 나서지만, 우리의 참생명이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이었음을 깨친 사람은 더 이상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자기 식’의 추구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없기에 추구할 일도 없는 사람을
불가에서는 무사인이라고 호칭한다
나를 세우지 않으니 못할 일이 없다
이는 자기 삶을 주관하며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겉으로 보면 금광석(金鑛石)이 그냥 여느 보통 돌처럼 보일지라도 금광석에는 분명 금(金)이 들어 있으며, 구름 낀 밤하늘이 어두울지라도 분명 구름 너머엔 달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없던 금이 생긴 것이 아니고, 없던 달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본래 있는 금이요, 본래 있는 달입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는 ‘한 줄기 차가운 빛은 밖의 위음(威音)이다’는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음(威音)’이란 최초의 부처님이라고 하는 ‘위음왕불(威音王佛)’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위음왕불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이전에 출현하신 부처님입니다. ‘밖의 위음’이란 위음왕불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이전부터 우리는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말이며, 본래부터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니 구해야 할 부처는 따로 없습니다. 본래 부처니까 부처로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래서 ‘소에 의탁해 종(宗)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牛)라고 하는 참생명자리를 찾고 보니까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절대무한의 부처님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이를 마음의 근본[宗]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게송(偈頌)을 보면, 소를 타고 고향에 돌아와서 한가롭게 지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牛)라고 하는 근원적 생명자리를 찾고 보니 본래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기에 상대유한(相對有限)의 ‘나’는 따로 없습니다. ‘나’가 없기에 ‘나’가 추구할 무엇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열심히 찾았던 소도 공(空)하고, 소를 찾았던 사람도 한가로운 것입니다.
이처럼 ‘나’가 없기에 ‘나’가 특별히 추구할 일도 없는 사람을 일러 불가(佛家)에서는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할 일이 없다고 해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유한의 ‘나’의 입장에서 할 일이 없기에, ‘나’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은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무사인(無事人)은 진정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게송에서 ‘붉은 해가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무사인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얼핏 보면 게으름뱅이의 모습 같지만, ‘나’가 없기에 ‘나’가 추구할 바도 없는 무사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사인에게는 상대적 존재로서의 ‘나’가 없으며, 또한 ‘나’가 추구하는 대상도 없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소(牛)라고 하는 대상을 쫓지 않기에 채찍과 고삐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채찍과 고삐는 띠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사인에게는 ‘나’라고 규정지어진 테두리가 없습니다. 수행은 이러한 ‘나’라는 테두리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수행자라면 항상 방심하지 않고 스스로를 성찰하여 ‘나’라는 테두리에서 부단히 나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출가(出家)입니다.
출가의 진정한 의미를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집[家]은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와 그 주거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생명을 성취하려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집[家]이란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나’라고 규정지어진 모든 것입니다. 수행의 시작은 바로 이러한 테두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수행자는 당연히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집[家]에서 항상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고 하는 테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삭발을 하고 안하고에 관계없이 모두 출가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출가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거주하던 집과 정든 가족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상대유한의 ‘나’는 참으로 믿을 바가 되지 못한다는 자각에 따라, ‘나’를 규정하고 있는 고정화된 관념과 습관의 울타리를 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자신답게 드러내고자 하는 적극적인 삶의 지향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출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가는 결코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출가는 삶을 향한 기본 조건입니다. 따라서 출가는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생동안 쉼 없는 진행형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육성 법문 듣기]
팟캐스트 ‘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www.podbbang.com/ch/5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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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우도, 육조단경, 금강경, 반야심경 방송 중
문사수법회 www.munsasu.org 031-966-3581
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대중법회 _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경전학당 _‘성불成佛의 삶, 행원行願의 힘’
[중앙]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 저녁8시
[대전] 매주 목요일 저녁8시
*정진원 專修念佛(전수염불) _매월 넷째주 토요일 오후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