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6.10.28 (수)
 http://www.bulgyonews.co.kr/news/31461
발행일시: 2015/12/21 16:32:55  한기선
근원으로 돌아가다_返本還源반본환원
깨달음의 길 尋牛圖 (9)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더 이상 환상과 동일시하지 않으니,
어찌 수행과 계율에 의지하리오!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르른데,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성쇠 바라보노라.

 

이 ‘반본환원’의 그림은 버들가지가 늘어져 있고 그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앞의 여덟 장면들 중에서 버들가지와 시냇물이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바로 심우도(尋牛圖)의 맨 첫번째인 ‘심우(尋牛)’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심우(尋牛)’의 그림은 소(牛)로 상징되는 참생명자리를 찾아나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심우’의 배경이 바로 ‘반본환원’의 그림과 같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참생명자리를 찾고 보니, 그 자리는 참생명자리를 찾으러 나섰던 처음의 바로 그 자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반본환원(返本還源)’ ― 말 그대로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근원자리는 어디에 따로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떠난 적이 없는 자리이고, 한번도 잃어본 적이 없는 자리입니다.


‘심우(尋牛)’는 소(牛)를 찾기 위해 고향집을 나서서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심우’를 회상하며 화자(話者)는 그 첫머리에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찾고 나서 돌아보는 입장에서는 애초에 잃을 것도 없고 새삼스레 찾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밖으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본환원’의 그림이 ‘심우’를 묘사한 그림의 배경과 같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본래부터 잃은 적도 없고 따라서 새삼스레 찾을 것도 없는 우리의 참생명자리를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하고 있습니다.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라고 하는 의미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청정(淸淨)하다고 하는 것은 ‘더럽다(垢)’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더럽다ㆍ깨끗하다’의 상대대립을 떠난 불구부정(不垢不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청정(淸淨)은 더러울 것도 없고, 깨끗할 것도 없는 공(空)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 청정하기에 더러워질 것도 없고, 깨끗해질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대적인 조건도 우리의 참생명을 물들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흔히들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도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이러한 참된 생명가치에 대해 눈뜬 사람은 무한한 성취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다가오는 무한한 인연 속에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확인하고,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었음에 늘 감사하며, 무한공덕의 주인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입니다. 부처님생명은 절대무한(絶對無限)이기에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처님생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현상계(現象界)입니다. 즉 인연 따라 끝없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이 현상계는 부처님생명이 드러난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림자는 어디까지나 그림자일 뿐입니다. 상대유한세계(相對有限世界)인 현상계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자에 결코 속지 않으며, 생명의 근원자리를 양보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 ‘반본환원’의 단계는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분명히 알아서 현상계에 끄달리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지켜볼 줄 아는 단계입니다.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고 하는 것과, “더 이상 환상과 동일시하지 않으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르른데,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노라”고 하는 것도 다만 있는 그대로를 지켜본다는 의미입니다.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라고 하는데, 함이 없다는 것은 ‘내’가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의 ‘나’를 포기했기에, 더 이상 ‘내’가 하는 수행과 계율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 수행과 계율에 의지하리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는 결코 수행을 할 수도 없고, 계율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수행이란, ‘나’를 없애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열심히 수행한다면, 끝내 수행하는 ‘나’가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의 ‘나’를 항복하면 본래부터 있던 절대무한세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특별한 존재로 되고자 ‘나’를 내세우는 수행이라면 끝내 상대유한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앞의 ‘인우구망(人牛俱忘)’에서 스스로를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을 올릴 정도의 훌륭한 수행자라고 생각하는 법상(法相)을 갖고 있던 법융(法融)스님의 일화가 그 좋은 예입니다.


수행은 어떤 특별한 존재로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특별한 무엇을 추구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게송(偈頌)에서는 근원자리에 돌아가서 보니, 본래부터 떠난 적이 없는 자리이고 한번도 잃어본 적이 없는 자리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본래 떠난 적도 없고 잃은 적도 없는 자리이지만, 이것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 근원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나’를 내세우며 ‘자기 식’의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참생명자리를 보지도 못하고 참생명의 소리를 듣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암자 속에 앉아서 오직 ‘자기 식’으로만 암자 밖의 사물을 인지하는 것과 같기에, 귀와 눈이 있어도 귀머거리와 장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자체 그대로의 절대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못하면 상대비교를 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조건을 충족하기 전에는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물이 아득한 풍경은 그 자체 그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붉은 꽃도 파란 꽃이나 노란 꽃이 가지고 있지 못한 붉은 꽃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반본환원’은 본래부터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생이 열심히 수행을 하면 언젠가는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생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를 이루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본래 부처였는데 이를 모르고 지내다가 본래 부처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팔만사천의 부처님 법문은 결국 ‘본래부터 부처였으니 부처노릇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염불(念佛)입니다.

 

염불은 나의 진정한 생명가치가 드러나도록 해주는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부처님의 참이름이면서 우리의 참이름인 ‘아미타불’을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먼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 같지만,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리를 향해 “나무아미타불”하고 불러주시는 소리에 우리가 응답하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이 날 부르시고, 내가 부처님을 찾으니, 종국에는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본래부터 나에게 주어져 있는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이 드러나게 되고,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육성 법문 듣기]
팟캐스트 ‘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www.podbbang.com/ch/5845
-스마트폰 : play스토어> ‘팟빵’앱 설치>검색창에 ‘여여’ 입력>‘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선택
현재 심우도, 육조단경, 금강경, 반야심경 방송 중

 

문사수법회 www.munsasu.org  031-966-3581
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대중법회 _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경전학당 _‘성불成佛의 삶, 행원行願의 힘’
           [중앙]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 저녁8시
           [대전] 매주 목요일 저녁8시
*정진원 專修念佛(전수염불) _매월 넷째주 토요일 오후 2시

 

* ‘나눔의 날’ 동지冬至 기념법회 _12/22(화) 오전 10시30분
                                <팥죽 공양, 새해 달력 제공>


* 새날맞이법회 _12/31(목) 밤 10시부터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l   신문사 소개   l   연혁   l   조직구성   l   본사 및 지사 연락처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  
copyrightⓒ2001 주간불교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30길 21, 1415호(낙원동, 종로오피스텔)
편집국·업무국 02)734-0777 Fax : 02)734-0779
주간불교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