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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4/01/02 14:54:36  이한규
법신(法身) 여래는 보이지 않는가?

지난 목요일 산청 왕복사의 자우 스님이 진주 불교대학에서 경전 강의를 겸한 법회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해박한 불교 지식과 소탈한 성품, 절간에 머무르는 구두선(口頭禪)이 아닌 대중들과 함께하는 참 불자의 표상으로서의 스님의 성품에 매료되었는데 그날의 법회는 스님의 그러한 진면목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넉넉한 스님의 용체(容體)를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세밑이 된다.


세밑이다. 누구라도 이 세밑에는 지난 일 년간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올 새해는 지난 해 보다는 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소시민인 우리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더 나은 내일을 구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하면서 올 한해는 부처님 법 한 구절이라도 실천하는 불자로서의 삶을 행하여야겠다는 서원(誓願)을 해보았지만 지나놓고 보면 역시나 허상(虛像)뿐인 색(色)을 좇아 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 버린 한 해였다. 범부(凡夫)로서 한해를 지나고 말았다.

다들 잘 알고 있음에도,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작심삼일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세밑에 간직한 마음들은 어느 틈에 잊어버리고 천년이나 살 것처럼, 세상이 다 내 것 인양 경거망동한 시간들을 보내다가 또 해가 바뀌는 세밑이 되면 마치 처음 맞는 그것인 것처럼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져보는 것이 우리네 세속(世俗) 사람들의 해맞이 패턴이다.


스님은 어두워지면 해가 보이지 않지만 어두워진다고 하여 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청정본심은 비록 서산에 넘어가 버린 태양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존재하면서 우리 생의 큰 부분을 조명하고 있고 그 속에 우리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부처님의 말씀들을 간직하는 청정 본심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호수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물결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깨달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은 보지 못하고 허상에 지나지 않은 물결만 보고 있다.


부처님 세상의 법에서는 모든 수행의 근본을 자비에 두고 있다. 불도를 닦는 수행자이건 일상의 속(俗)을 살아가는 우리 대중들이건 부처님의 자비를 입으로 진언하는 불자들이라면 당연히 질곡(桎梏)하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한다.

경전 말씀에 보살은 자비와 인욕으로 자신을 치장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생들로 하여금 자비와 인욕에 머물도록 한다고 하였다.


자비와 인욕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등이 서로 붙은 한 몸이다. 인욕을 하지 않는 자비란 있을 수 없으며 자비심은 인욕한 만큼에서 나온다.

우리 선조들은 30년을 주기로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없다.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지독한 가난과 국민성을 ‘빨리빨리’로 바꿔버린 계속된 전쟁의 참화를 우리는 잊고 산다.

지금 우리는 단군이래 가장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빈곤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마치 천 년이나 만 년 전부터 복지와 풍족을 누렸다는 듯이 가난을 잊은 채 물질 만능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풍요를 누리는 이면에는 아직도 당장 한 끼의 밥을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도시의 변두리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이웃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화두이며, 이들에게 인욕(忍辱)하고 따뜻한 자비의 손을 내밀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마음 맞는 친구들을 부추기고 동반하여 손주들에게 줄 용돈 한 푼도 절약하여 따끈한 찐빵 한 아름과 두툼한 겨울 옷 몇 벌이라도 사들고 변두리 시골의 조그마한 불우시설에 들러야겠다.

범부는 단지 색신(色身) 여래만 보고 법신(法身) 여래는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기를 “가히 신상(身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하자 수

보리는 “범부는 단지 색신(色身) 여래만 보이고 법신(法身) 여래는 보지 못하는 것을 아는 까닭에 못 봅니다,”고 대답하였다.

오늘도 법당에 앉았지만 내 눈에는 부처님의 색신만 보일뿐 결코 법신은 보이지 않는다. 불우시설에서 힘없는 눈망울을 굴리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기다리는 그들이 어쩌면 참된 가르침을 몸소 설파하는 부처님일지도 모른다.


정토업을 닦기 위하여 엄격한 청정계율을 지니고 보리심을 발하면서 진실한 믿음과 발원을 다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수시로 경전을 읽고 외우는 법사(法師)는 능히 가능하리라 믿어 다가오는 새해에는 이 두 가지 법사는 반드시 이루리라고 다짐을 해 본다.

능히 성불하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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