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왕국, 가야(伽倻, 駕洛)
독자적인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아 잊혀진 왕국, 신비의 나라로 불리워지던 가야.
‘신비의 나라’, ‘잊혀진 왕국’이라는 수식어는 가야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심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에 가야가 남긴 고분(古墳)들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자긍심을 넘어 이를 계기로 가야 역사를 재조명하고 발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예비 후보로서 잠정목록에 올린 후 지속적인 연구와 활동을 한 결과 마침내 2023년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이다. 우리나라는 16번째의 문화유산 보유국이라는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가야 고분은 그 자체로서 보호하고 보존하여야 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시대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체제가 기존의 부족국가 형태에서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로 권력의 중심축이 이동한 시대였다.
세계 각지의 왕조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변방에 자리 잡은 가야 지방에서 20여개 이상의 각 부족 단위들이 각자 독립된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협조적인 수평적 동반자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인 조류에 편승하지 못한 구태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폄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체제를 500여년간 유지하였음은 그 자체로서 세계사적으로 극히 이례적인 모델임이 분명하므로 유네스코 위원회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정치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고 주목하여 가야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힘을 바탕으로 한 국제질서가 유지되던 시기였으므로 힘, 즉 무력을 앞세운 침탈로 영토와 노예, 비록 원시적이지만 최신의 산업시설 강탈하는 침략 전쟁이 정당화되었고 당연시 되었다.
가야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백제와 신라로부터 수시로 침공을 당하였고, 이러한 외세에 맞선 가야는 부족의 동맹에 의한 연맹군이 공동으로 대항하여 외세를 물리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므로서 5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순한 동맹이냐 아니면 보다 발전한 단계인 제국(帝國)이냐에 관하여 이론이 있지만 필자는 굳이 제국을 고집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러한 동맹 관계는 단기적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500년을 지속한 예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각 동맹체는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므로 유네스코 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면을 높이 산 것이라고 사료된다.
아직 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발굴과 조사는 지극히 정체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금관가야의 왕궁지로 사실상 인정되고 있는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조사는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이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보류되고 있으며 가야 시대의 생활 터전이었던 왕궁과 성곽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만시지탄의 면이 있지만 지금 부터라도 고분 속에 잠들어 있는 500년의 비밀을 풀어야 유네스코 등재의 참뜻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 불교 역사의 기원에 관한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를 통하여 불상과 불경이 전래되었으며, 이어서 384년에 백제 침류왕때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불교를 전래하였다. 신라불교는 법흥왕에 이르러 승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비로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味鄒王)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19대 눌지왕(訥祗王), 21대 소지왕(炤智王)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 많은 불교 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야의 불교 전래이다.
가야제국의 수립 초기에 수로왕과 황후인 허황옥과 관련하여 김해 신어산의 은하사, 하동의 칠불사, 부산 명월산의 흥국사와 신국사, 진국사에 관한 설화와 함께 유의미한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허항후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에서 뱃길을 통하여 가야로 오면서 그의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왔으며 이것이 바닷길을 통한 인도의 남방 불교 전래라는 주장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국호인 가야 또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유래되었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즉 인도의 동북부에 있는 비하르주에는 ‘부다 가야(Bodh Gaya)’라는 도시가 있고 이 지역에서 가야의 철기 유물과 상당히 밀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남부에 ‘구린지 산(kurinji moutain)’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는데 이 구린지산의 ‘구린지’를 삼국유사에서 음차하여 인용하는 과정에서 ‘구지(龜旨)’라고 번역하여 결국 ‘구지봉(龜旨峯)’ 이라 불렀음은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 시대에 인도에서 직접 불교가 들어왔다는 주장, 인도에 ‘가야’라는 지명과 ‘구지산’이라는 지명이 있음은 우리나라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초가 됨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해석들은 하나의 주장일뿐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은 학계와 불교계의 태만의 결과일 것이다.
불교계와 사학계의 분발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