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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수 시인 |
지리산에서 발원한 작은 시냇물이 남명 조식(南冥 趙植) 선생의 얼이 깃든 산천제(山天齊)를 지나며 쏜 살 같이 달려 시천(矢川)을 만들고 굽이쳐 달리는 시천의 질풍노도(疾風怒濤)는 단성현에 이르러 덕천강에 합쳐지고 아직도 거친 물살을 추스러지 못한 쎈물은 남으로 남으로 내달리다 긴 여정의 막바지 진양호를 바라보며 기세가 꺾이어 거울보다 잔잔하고 호수에 담긴 물처럼 더 순한 물이 되었다. 진양호로 들어가는 길목에 비로소 긴 숨 뱉으며 고개 들어 벌판을 바라보니 벌써 초여름 따가운 정기 넘치는 벌판 저 멀리 우뚝 선 참으로 아담하고 정겨운 절간이 보이는 구나. 그 미혹한 자태는 천세 고찰(千歲 古刹)보다 곱고, 백세 고승대덕(高僧大德)보다 더 위엄차며 날렵한 처마는 금새라도 날을 듯 하늘을 향하고 도량을 거니는 누렁이가 마치 일곱 살 동승의 재롱처럼 한가롭지만 내 눈은 이미 인토(忍土)의 사바세계를 넘어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손짓하는 구름 따라 활짝 열린 부처의 세계로 가리라.
청룡사 법당 대웅전은 부처님으로, 대웅전 뒤로 붉게 물든 노을은 광배(光背) 바로 그것이었다.
산청군 단성면 호리에 있는 자그마한 사찰 청룡사.
필자는 20여년 전 마치 천렵(川獵)이나 하듯 두루 절을 탐방하다 가을이 익어가는 해그름 나절, 석양에 물들어 더 붉어진 청룡사의 자태에 끌려 저절로 발걸음이 향해졌고, 때늦은 방문에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챙겨 주신 공양 밥 한 그릇은 환희였다.
공양주보살의 법명은 연화심(蓮花心) 이었다. 부처님의 넉넉한 자애가 온 누리에 걸쳐 서광으로 빛나고 관세음보살의 기를 안은 연화심 보살의 따뜻한 마음에 끌린 나는 그 후 시간이 날 때 마다 찾은 덕분에 연화심 보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대화를 하다 보니 보살이 이 절의 주지 스님인 명진스님의 어머니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명진스님은 서울의 명문대학인 소위 SKY대학을 다니던 중 갑작스레 백혈병에 걸려 그때부터 25년의 세월동안 투병생활을 해 오고 있다. 스님은 여러 차례의 항암치료와 두개골을 여는 뇌수술을 감당하면서 평소 동경해마지 않던 불가 귀의를 발심(發心)하고 마침내 행자과정을 거치고 사미계, 비구계를 받았다. 지금도 정신이 초롱한 때면 몸은 누워 있어도 입으로는 염불, 독송에 꼬박 하루 해를 넘기는 발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과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나아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대비심(大悲心)의 발로였으리라.
살을 뜨고 뼈를 깎아 자식에게 준들 아까워 할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명진스님의 어머니야 말로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표상이라 감히 일컬어 손색이 없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을 위한 거동, 착탈의 조차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지 못하는 스님의 곁에서 하루 24시간을 지키면서 시간시간 순서대로 약을 먹이고, 음식을 씹지 못하기 때문에 걸쭉한 죽 형태의 유동식을 만들어 옆에서 떠먹이면서도 결코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25년의 세월은 사랑은 차라리 종교였다.
처음 발병한 후 뇌수술을 담당한 주치의가 몇 달을 살기가 어려우므로 퇴원하고 임종을 준비하라는 권유를 하였으나 연화심 보살은 스님을 청룡사로 데리고 온 후 그때부터 오로지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깨끗한 곡식과 야채만으로 식단을 준비하고 아들에게 먹이는 음식은 그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게 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먹인 결과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주치의의 사형선고가 무색하게 25년을 이어 오는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 모 티비 방송국에서 수 차례에 걸쳐 다큐멘터리 프로를 제작하고 싶다는 연락을 하였으나 연화심 보살은 아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과 세상 어머니들의 당연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거절하였다.
명진스님의 예후는 때로는 좋아 졌다가도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반복하여 이제는 이승에서의 삶이 다 한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상황이 수 십 번 수 백 번을 반복하였지만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는 부처님도 감복하여 그때마다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25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사람구실을 못하면서 자리를 보전하여야 하는 극악의 상황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였지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을 외면할 수 없어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러며 오늘도 투병을 하고 있다.
연화심 보살의 정성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 절을 찾는 모든 신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절을 찾으면 무조건 공양 상(床)을 봐 오는 보살님의 후의에 처음 놀라고 돌아 갈 때 과일 몇 알, 떡 한 조각이라도 들려 보내야 하는 정성에 두 번 놀라고 그러면서 초파일이나 우란분절, 10재일에도 안내문 한 장 보내지 않는 깔끔함에 또 놀라게 된다.
부디 해그름에 후광처럼 비치는 노을만 말고 먼동이 터는 새벽 하늘의 맑고 힘찬 기운이 청룡사와 명진스님, 연화심 보살의 머리 위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김용수 시인, 수필가, 소설가, 한국문인협회회원
본지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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