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명창이지” 안숙선 명창 칭찬
박자희는 전통과 창작 오가는 다양한 활동가
 |
| ▲소리꾼 박자희 명창은 독실한 불자로 '제31회 임방울국악제'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
우리는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사람을 명창이라고 부른다. 특히 판소리의 높은 경지에 이룬 사람을 가리킨다. 일찍이 신재효는 광대의 요건이 인물치레, 득음, 너름새를 꼽았다. 탁하면서도 맑은 맛, 부드러운 데가 있어야 하고 슬픔이 깃들어야 哀怨聲, 최상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판소리 <춘향가> 국가무형인간문화재 제5호인 안숙선 명창은 박자희의 첫 완창 심청가 공연 중 1부 끝 휴식시간에 대기실로 와서 “이만하면 명창이지” 한 마디 말씀을 주셨다.
피 토하는 고행의 길을 걸어야 했던 지난 세월이 이 한 마디로 사라졌다.
지난 9월 18일 ‘제31회 임방울국악제’서 대상인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스승의 이 같은 평가는 빗나가지 않았다. 판소리 분야 등 각종 대회에서 몇안되는 대통령상이라는 명예와 의미와 함께 타고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소리꾼 박자희(朴滋禧)에게 계묘년 한 해는 무엇보다도 의미가 깊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님전에 비나이다’ <흥보가>는 박자희가 여덟살 때 처음 배운 판소리, ‘임방울국악제’서 판소리 <흥보가> 중 ‘두 손 합장’은 기량을 갈고 닦은 30여년 세월 중 불과 두 번째 도전이었다. 전국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전국을 망라한 재원들이 참가한 전국대회이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 노래에 재능을 보여 아버지가 판소리를 배워 놓는 것이 어떻겠냐? 하시어 집 근처있는 전북 도립국악원에 어머니와 손잡고 놀이터처럼 다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꿈 많던 철부지 소녀는 지금 대한민국 전통음악의 올곧은 계승자로 탄생됐다. 하나의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 2021년 판소리 30년을 맞아 <심청가> 첫 완창이라는 쾌거를 기록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 말처럼 ‘전통과 창작’, ‘옛것과 현대’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국악인으로서 기대를 모은 ‘소리꾼’의 한 사람으로 변신했다.
“죽어도 여기서 죽자.”
‘임방울국악제’서 일곱 명의 심사위원 중 네 사람이 만점인 99점을 줬다. 이를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임한 결과였다. 스승의 기대에 흠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좋은 결과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그 영예는 스승님 덕분이라고 안숙선 명창에게 공을 돌렸다.
“저를 믿고 잘하고 있다고 든든하게 지켜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 관득행(觀得行) 보살의 지극한 보살핌과 공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우연일지 계묘년 한 해는 이런저런 행운이 따랐습니다.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의 부처님을 향한 음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계묘년 한 해는 행운의 1년
스승 안숙선 명창과 함께 송년무대
 |
| ▲2022년 국립극장 송년 판소리 춘향가 완창 분장실에서 안숙선 명창과 함 |
지난 10월에는 ‘엑스포 유치 콘퍼런스’ 일원으로 아프리카 케냐를 다녀왔다. 비록 유치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의미있는 나들이였다.
한 해를 보내는 마당에 가장 뜻 깊은 것은 스승 안숙선 명창을 모시고 송년 무대에 선다는 사실이다.
“11월부터 스승 안숙선 명창과 <완창 판소리 심청가 연말무대>에서 분창자로 무대에 서기 위해 열중하고 있습니다. 안숙선 명창의 제자이자 전승자 다섯 명이 분창자로 30분씩 출연하게 됐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뜻 깊은 출연이라 소중한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2023년 안숙선 선생님과 완창 판소리 연말 무대이니 더욱 뜻깊습니다.”
박자희는 12월 30일(토)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판 심청이 행선 날 부친과 이별하는 대목을 맡아 특유의 열창을 펼친다.
또 하나 6월에 있었던 영화출연도 계묘년 얘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영화 <그릇된 소녀>에서 엄마이자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창극 배우역을 맡았다.
“판소리 집안 얘기를 그린 것으로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마무리 작업 단계인데 열심히 임하고 있습니다.”
올해 의미 있는 것 중 우수정(국립전통예중 3), 최은우(국립국악중 2) 두 제자의 독창회 공연 이야기도 의미가 깊다.
“11월 문화공간 아이원서 두 제자가 어른도 하기 힘든 한 시간 공연한 것이 대견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어린 학생이 1시간 판소리를 완창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가능성 국악을 위해
더 겸손하게, 더 착하게, 더 열심히
 |
| ▲‘제31회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박자희 씨가 흥보가 중 ‘두손 합장’ 대목을 부르고 있다 |
12월 18일 아침 전국 기온이 영하 18도를 기록했다. 바닷물이 얼고 KTX 유리창까지 추위에 금이 갔다. 갑작스런 한파 소식에 그래도 송구영신, 다사다난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걸 보니 계묘년(癸卯年)도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다.
“국악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지켜오신 국악을 후배들이 잘 보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입니다.”
지금 안숙선 선생으로부터 판소리 5마당을 사사하고 있는 박자희는 대통령상 수상을 계기로 더 착하게, 더 겸손하게, 더 많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소탈한 소리꾼 박자희에게서 우리는 국악, 나아가 판소리의 밝은 앞날이 예견된다.
 |
| ▲제31회 임방울국악제 본선무대에서 열창을 하고 있다 |
“지금까지 국악인으로서 판소리와 함께 한 삶은 순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작가, 사진작가, 디자이너, 변호사... 지금도 초등학교 때 수많은 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온 세상이 내 것이다 하고 방대한 자신을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 소리꾼이 되면서 어느 때는 어둡고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을 혼자 걸어가는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인생이 내 꿈대로 뜻한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득음이라는 최상의 목소리를 향한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을 향한 길이 얼마나 훌륭한 길인가라는 소명의식이 모든 꿈 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맑음과 심청을 뜻하는 獨工의 공간 ‘淸’
판소리 등 국악 위한 일 벌일 터
‘淸 국악의 소리, 소리꾼 박자희’
 |
| ▲전주 우진문화공간에서 흥보가 완창 1부 중 모습 |
송파구 거마로에 있는 소리꾼 박자희의 연구소 ‘淸’은 창극 <심청전>에서 첫 주인공을 맡았던 것을 의미한 것이며, 그 뜻 자체처럼 맑고 고요하고 정결하고 깨끗하다를 지향하는 그 만의 공간을 말한다. 2021년 판소리 시작 30년 기념 <심청가>를 첫 완창한 것을 기억하자는 상징이기도 하고 나아가 소리꾼만의 독공(獨工)의 무대라는 의미도 있다.
가족이라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 전통국악인 한 사람도 없는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난 탓인지 집안 분위기도 단촐하다.
박자희는 중요 경연에 나갈 때마다 출연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 30년 넘게 뒷바라지한 어머니한테도 잘 알리지 않는다.
<제31회 임방울국악제> 경연 사실도 ‘나 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걱정 끼칠까봐 좋은 일일수록 말을 아끼는 게 습관처럼 됐습니다. 그런데 감격의 현장에 추임새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정말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임방울국악제> 때 무대에서 엄마의 추임새 소리가 나 어떻게 알고 왔나 궁금했는데 선배 언니가 몰래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 딸만 아는 어머니 부처님을 향한 기도, 아낌없이 성원을 보내는 후원자 아버지, 부모 걱정 끼칠까봐 말을 아끼는 무남독녀 외딸, 판소리 명창이 태어난 것은 조용하고 따뜻한 잘 어울리는 삼위일체 가정 분위기 탓이 아닌가 싶다.
독실한 불자 어머니 관득행의 보살행
박자희는 부처님께 판소리 등 음성불사
소리꾼 박자희의 어머니 관득행 보살은 독실한 불자다. 박자희는 기회가 있으면 어머니 따라 절을 찾았고 어머니가 다니는 하남에 있는 성불사를 참배해왔다. 와불 점안식, 산사음악회 등 행사에서 판소리와 남도민요 등을 음성불사를 했다.
“경기도 하남시 청량산과 남한산성 사이에 이어진 성불사는 박자희 소리꾼의 꿈을 비는 관득행 보살의 기도처입니다. 수도권 불자의 신행 도량으로 알려져 있고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 머무는 사찰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제게 一期一會 부처님과의 귀한 인연을 주셨고 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어느 날 어머니가 가져온 사찰 달력에서 ‘그럴 수 있지’라는 글귀를 읽고 깨달은 바가 지금까지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인간관계나 일에 있어 기대감을 내려놓고 달래다 보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어쩌면 이를 가리켜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할까, 어느 날 마음에 스며든 이 한마디는 소리꾼 박자희의 좌우명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인생을 살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부처님 말씀을 통해 행 그리고 불행을 지혜를 생각하게 된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둡고 긴 터널이 언제 내 인생에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판소리는 복잡한 줄거리를 노래하지만 그 속에는 서민으로부터 임금까지 웃기고 울리고 한숨을 토해내는 해학이 있습니다. 판소리 자체가 인생사라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스폰지’는 이 시대 소리꾼 박자희의 별명이다. 스폰지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다. 스폰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수용과 포용이다.
박자희는 판소리를 ‘하면 할수록 참 신기한 음악’이라고 풀이했다. 또 음악적 매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내다봤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스승님이 물려주신 귀한 소리를 갈고 닦아 전통을 잘 지키겠습니다.”
‘스승님의 귀한 소리‘ 갈고 닦을 터
좌우명은 ’그럴 수도 있지‘
 |
| ▲스승 안숙선 선생이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명이 박자희 명창이다 |
광주 출생의 임방울(林芳蔚, 1905~1961)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명창이자 국창으로 근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집안 대대로 판소리 명문가로 25세 때 서울박람회서 ‘쑥대머리’를 불러 유명세를 탔다.
당대 최고의 판소리꾼 임방울은 12살 때 ‘박재실창극단’에 들어가서 달 뒤에 무대에 선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소리를 하다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
57세 되던 해 임방울 선생이 사망하자 근 현대 판소리사에 큰 획을 그은 선생의 장례식은 200여 명의 여류 소리꾼이 소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고 한다. 임방울 선생의 판소리는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 성우향으로 계승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안숙선 명창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판소리 소리꾼이자 대통령상의 주인공 박자희는 자만이나 안주보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드리는 소리꾼이 되도록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임할 것을 다짐했다.
판소리는 맺힘과 맺음의 예술이다. 특히 판소리는 처절한 한의 바탕이다. 80년대 초 종로구 운니동 운당여관서 만난 병신춤의 대명사 공옥진은 길바닥이 무대이고 산 또한 무대라며 한과 설움을 덩더쿵 가락에 달랬다고 굴곡진 인생을 회고했었다.
소리꾼 박자희도 환경 탓을 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는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3년여를 연습실서 칩거하기도 했다. 어둠의 터널 같은 갈등의 세월은 앞에서 밝혔듯이 ‘죽어라 하고 해보자’ ‘그냥 해보자’ ‘그럴 수 있지’로 고독한 자기 투쟁이 승부욕으로 변했다. 이 당시 안숙선 명창으로부터 “늘상 연습해야지”라는 말씀도 큰 깨우침이 되었다.
국립극장 송년 마지막 무대
스승과 함께 하니 큰 영광
 |
| 2023년 12월30일 국립극장 하늘 무대 '안숙선의 심청가 강산제'포스타 |
소리꾼이라는 말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소리꾼은 판소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인 모든 것을 망라한다. 소리꾼 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인정하는 모습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판소리의 후예뿐만 아니라 탤런트적인 만능의 모습이 드러나는 게 박자희의 내면세계다.
박자희는 판소리는 물론이고 영화배우로 데뷔했는가 하면 <적벽가> 중 ‘불과 바람의 노래’를 첼로와 협연해서 호평을 받았다.
2010년 ‘해오름’ 국립극장서 창극 <심청전> 주인공 심청 역을 맡은 것도 특기할 일 중의 하나. 국립극장이라는 큰 무대서 오디션을 통해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니 소리꾼 박자희의 재능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좋은 소리를 들려 드리는 소리꾼이 되도록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리꾼, 창자(唱者), 광대(廣大) 판소리 명창을 가리키는 명칭들이다. 그 중 판소리에 높은 경지에 이룬 사람에게 명창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소리꾼 박자희, 그는 당대 최고의 판소리꾼이 되기 위해 부단히 독공을 하는 사람이다.
2024년 용의 해 甲辰年을 맞으면서 대통령상 수상을 하면서 소회를 밝혔던 그의 다짐에서 소리(노래), 아니리(말), 너름새/발림(몸짓) 등을 통한 대한민국 최고의 명창 소리를 기대해 본다.
글 / 길 주 전문위원
사진 / 이한규 주간
http://www.bulgyonews.co.kr/news/37855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