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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前 대통령이 8월 18일 1시 43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서거했다.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록 그는 탄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마치 겨울을 이겨는 내는 꽃인 ‘인동초’같았다. |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中>
한국 현대 정치사의 큰 별이 결국 졌다.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서거한 김대중 前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으며, 통일·인권운동을 신장시킨 장본인이었다. 또한 이로 인해 서슬퍼런 유신시대부터 신군부 시절까지 ‘좌익 용공세력’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록 그는 탄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마치 겨울을 이겨는 내는 꽃인 ‘인동초’같았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前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 17일 신군부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됐으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 해 7월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前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대권 도전을 실패했으며,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95년에는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고,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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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평양을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김대중 前 대통령. 그는 분단이후 최초로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다. |
재임당시 그는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했으며, 세계 최고의 정보화 사회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김 前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신중일 기자 bono98@jub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