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의 ‘그는 걸어서 온다’
불자시인 윤제림의 신작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가 나왔다.
표제작부터 살펴보자. 〈그는 걸어서 온다〉에서 ‘그’는 누구일까?
한양성 가는 방자처럼 걸어서 날 찾아오는 사람. 아니면 어이 가리너. 혼자서 어이 가리너,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칠흑의 어둠 속에서 열나흘은 흐느끼겠지. 어이 가리너, 이정표도 없는 길을. 울부짖으며 맨발로 내딛겠지. 생각느니. 안개 속 구만리 벼랑길로 나를 데리러 오는 그이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그 먼 길을 오토바이도 없이 걸어서 오는 사람.
시를 읽고 나면 명확해진다. 그는 저승사자다. 이승에서 저승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 무정한 그이를 가리켜 시인은
‘착한 사람’라고 말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근거를 찾기 위해 다른 시편인 〈걸레 스님〉을 살펴보자.
청소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담임 선생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시 제목이 걸레스님이다. 그리고 “괜히 왔다 간다”는 중광스님의 임종게다. 게다가 친절하게 시인은 제목에 주까지 달았다. 중광(重光, 1935~2002)이라고. 그러니 당연히 이 시는 중광스님의 삶을 다룬 것이다. 여백이 많아 감동이 큰 동양화처럼 이 시는 짧지만 오랜 여운을 준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이라는 시에서 삶을 소풍에 비유한 것처럼 윤제림 시인은 삶을 학교 다니는 것에 비유한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도망가는 청소당번이 남긴 말은 “괜히 왔다 간다.”는 한 마디다. 몹시 속된 나머지 성스럽게 여겨지는 중광스님의 삶은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 불량학생의 이미지와 고스란히 일치한다.
중광스님의 삶이 우리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바로 유유자적하는 달관과 무욕이다. 시인이 저승사자를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다. 삶의 애착을 벗어던지면 죽음으로 인도하는 이조차도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시편 〈저녁놀〉도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섭섭하지 않은 구경이 어디 있으랴/ 구경꾼들은 뒷걸음치며 침을 삼키는데/ 소리꾼은 자리를 걷고,/ 고수는 북을 들고 일어난다.// 얼마를 내야 하나/ 저 뜨거운 소릿값으로.// 김밥 할머니가 일억을 놓고 나간다/ 바느질 할머니가 십억을 던지고 들어간다./ 붉은 구름바다에,/ 범피중류 떠나가는 뱃전에.
시인은 이번에는 삶이란 저녁놀 지는 뱃전에서 듣는 소리와 같다고 노래한다. 따라서 뜨거운 소리를 들었으니 소릿값은 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일억을 놓고 가는 김밥할머니처럼, 십억을 던지고 가는 바느질 할머니처럼. 달관과 무욕을 깨닫고 나면, 타자에 대한 자비심이 뒤따른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노래는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만을 찾아서 위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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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7천5백원 |
불국사를 풀국사라고 말하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여자와 머나 먼 이국에서 손목을 잃은 스리랑카 젊은이와 남편이 자꾸만 때려서, 시어머니가 자꾸만 욕을 해대서 우는 안남댁과 연변서 목포로 낡은 배를 타고 온 이 시대의 심청이들이 바로 그 위무의 대상이다.
시인이 낮은 곳의 한숨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은 불심(佛心)이 지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근거를 〈춘향가〉에서 찾을 수 있다.
부여중학교, 오늘도/ 이층 창가에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여선생을 이기려면// 나는 아무래도, 여기/ 표 파는 여자나 되어야 할까봐요./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신을 흔들자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애인처럼 사랑하는 시인이기에 “내가 가도 되는데 그가 간다. 그가 남아도 되는데 내가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