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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08/05/09 15:23:45  유응오
큰 산(崇山) 아래에는 큰 봉오리(大峰)가 있다
“도둑놈, 네 ‘병 속의 닭’을 꺼내야지.”

벽안碧眼의 납자를 찾아서=숭산 행원 대종사 전법제자 대 봉 스님


대봉스님을 만난 곳은 공주 계룡산 무상사. 무상자 주지 무심스님이 대봉스님과의 인터뷰에서 통역 역할을 해줬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숭산스님의 영결·다비식 이야기로 시작됐다.
“다비식 날, 비가 많이 와서 디지털카메라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큰 스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기자의 말에 대봉스님은 벽 한 쪽에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켰다. 한 수행자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수행자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웅장한 성(城)처럼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숭산 스님의 다비식 모습이었다. 숭산스님의 법열은 언제까지나 제자들에게 오묘한 진리의 후광(後光)으로 존재할 것이었다. 사진에 향했던 시선을 거두자 대봉스님은 은사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1년 동안 곁에서 모셨던 얘기를 했다.

대봉스님은 “마지막 1년을 함께 한 제자로서 감히 말하건대 은사 스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입적할 수 있는 법력을 지닌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병원 시설이나 치료 수준이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치료비 일체를 내주겠다는 부호 신도가 있었음에도 굳이 숭산스님이 고국에 머물렀던 까닭은 자신이 펼쳤던 세계일화(世界一花)의 구심점이 화계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봉스님은 이어 자신이 사문(寺門)에 들게 된 인연에 대해 설명했다. 대봉스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동쪽 끝 필라델피아 근교 엘킨스 파크 태생이다. 유태계 미국인 출신인 스님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형제관계는 3형제 중 장남. 어릴 적 스님은 공을 차며 잔디밭을 누비길 좋아했던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스님은 11살 때 일본 가마쿠라(鎌倉, Kamakura)에서 펼쳐진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가 뜻 깊은 경험을 하게 된다. 스님은 가마쿠라 대불을 본 순간의 감동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의 입가에 피어난 은은한 미소 때문이었을 거예요. 부처님 앞에 수박을 올리면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매우 평온하게 느껴졌어요.”

가마쿠라 대불을 본 후 스님은 불교에 대해 남 다른 애정을 갖게 된다. 불교서적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사색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스님은 처음에는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 6개월만에 심리학으로 전과했다. 스님은 대학 시절 미국 국방성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명분은 간 데 없어지고 실리만 좇는 시위 지도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물을 느낀 스님은 더 이상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다.

스님은 대학 졸업 후 4년간 병원에서 카운슬러로 일하면서 환자들의 마음에 무겁게 놓여 있는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스님은 애정 없이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보면서 병원생활에 회의를 갖게 됐다. 자신의 근원적인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스님은 고행의 길을 걷게 된다.

도자기공부터 조선소의 용접공까지 닥치는 대로 막일 터를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잠수함 만드는 공장까지 발길을 돌리게 됐다. 말 그대로 방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대봉스님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덕 높은 스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여 찾아간 곳이 뉴헤이븐 선원이다.1977년 5월 숭산스님을 친견한 후 그는 ‘삶의 나침반’을 얻게 된다.

강연을 듣는 내내 대봉스님은 사막을 헤매던 방랑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기쁨에 충만했다고 한다. 한 청자가 “어떤 게 미친 것이고 어떤 게 미치지 않은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숭산 스님은 막힘없이 그 해답을 제시했던 것이다.

“네가 많이 집착한다면 많이 미친 것이고, 조금 집착한다면 조금 미친 것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미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도 실은 마음의 망상이 만든 것이다. 헛된 ‘나’를 버리고 진실한 ‘참나’를 찾고 싶다면 참선수행을 하라.”

숭산스님의 말에 감화를 받은 대봉스님은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선원(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세운 선원으로 관음선종의 본사격인 곳이다.)으로 출가를 한다. 스님은 1984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받았고, 4년 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서울 화계사를 처음 찾은 것은 1984년 9월. 당시 숭산스님은 대봉스님을 데리고 전통사찰 40여 곳을 일일이 돌며 한국사찰문화를 상세히 소개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화계사에 온 지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국 프로비던스에 ‘금강선원’이 문을 열었는데, 마땅한 지도법사가 없었던 것이다. 은사스님과의 일화 중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병 속의 닭’이라는 화두를 내린 것이라고 한다. 숭산스님이 첫 번째 유럽여행을 마치고 프라비던스 선원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숭산스님은 유리병을 주면서 대봉스님에게 아래와 같이 물었다고 한다.

“누군가 밑은 넓고 목은 가느다란 병 안에 달걀을 넣고 따뜻하게 잘 보존해 달걀을 부화시켰다.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됐는데 병을 나올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그 병을 깨트리지 않고 닭을 꺼낼 수 있겠느냐?”
“어떻게 ‘병 속의 닭’을 꺼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스님은 검지를 치켜 들었다.
“도둑놈, 내 닭은 가져가서 뭐하려고. 네 ‘병 속의 닭’을 꺼내야지.”

너무 무례한 질문을 던진 게 뒤늦게 죄송스러웠다. 대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서 1999년 4월 인가를 받은 전법제자이다. 전법제자라 함은 은사로부터 공안을 점검 받았다는 증표이다. 그런 대봉스님에게 감히 “병 속의 닭은 꺼냈느냐?”고 물었으니…. 겸연쩍은 분위기를 바꾸려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직 모를 뿐’과 ‘오직 할 뿐’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요?”
‘오직 모를 뿐’과 ‘오직 할 뿐’은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들의 주된 공안이자 가르침이기도 했다. 스님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 또 필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Who are you?”
스님이 가리킨 ‘You(너)’는 필자의 신분이나 직위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이었다. 스님은 일종의 선문답을 하고 있었다. 기자는 할 말이 없었고, 입이 탔다.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댔다. 대답이 떨어지자 대봉스님이 찻잔에 찻물을 따라줬다.

“이 차를 미국에서는 ‘Tea’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차’라고 합니다. 그러나 맛은 똑 같습니다. 이 차는 차나무에서 딴 것입니다. 차나무가 땅 속의 씨앗이었을 때 제 이름이 차나무인 줄 알았겠어요? 마찬가지로 기자님이 어머니 뱃속에서 자랄 때부터 이름이 있었던가요? ‘오직 모르뿐’, 그것을 알면 ‘오직 할뿐’만 남습니다. 기자님도 이름을 모르던 시절에도 어머니의 젖을 물고 숨을 쉬고 울고 웃고 잠을 자지 않았습니까?”

대봉스님이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93년 9월이다. 999년 가을이 돼서야 명행스님이 선원으로 들어왔으니 대봉스님은 홀로 무상사를 6년 동안 지킨 셈이다. ‘오직 모를 뿐’과 ‘오직 할 뿐’의 일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숭산스님의 맏상좌로서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를 물으니 대봉스님은 검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대봉스님이 무상사 주지 무심스님과 함께한 모습
“저기 산에 나무들이 많지요? 저기 산에 있는 나무들 중 어느 것이 제일 귀합니까?”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게 어디 있나요.”
“그렇죠. 비는 저 산의 모든 나무들에게 골고루 내립니다.”

대봉스님의 말뜻은 무엇일까? 은사인 숭산스님이 모든 제자에게 자애로웠던 것처럼 자신도 그러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불법은 자비로움으로 충만하여서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만물을 두루 비춘다는 뜻인가? 아마도 둘 다인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밖을 내다봤다. 천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대봉스님과 무심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길,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서 무상사를 올려다봤다. 어둠이 깊어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큰 산(崇山)이 뻗친 자리에는 큰 봉오리(大峰)가 있을 수밖에.

공주 계룡산=유응오 기자


대봉 스님은?
대봉 스님은 미국 필라델피아 엘킨스 파크 출생이다. 1977년 숭산스님 법문에 감화돼 불법에 귀의했다. 1984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이후 서유럽과 미국 선원에서 수행을 지도했다. 198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법 제자가 됐다. 현재 무상사 조실로 있으면서 외국인 수행자들에게 감로법문과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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