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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5/08/22 10:05:31  이한규
서동석 박사의 AI시대 생활불교수행(19)
지관(止觀)의 원리와 방법

수행은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 보고,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종합적인 활동이다. 특히 불교 수행은 존재의 근원을 궁극으로 참구해서, 위 없이 평등한 반야의 지혜를 얻고 대자유를 증득하는 최고의 수행법이다. 그러나 이런 수행법을 부처님이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유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피상적인 원인은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이 한시도 고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 보면, 청정하지 못한 인연들이 수억겁에 걸쳐 나의 잠재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그 업연의 발현에서 벗어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부처님의 핵심 수행법에 관해 얘기했듯이,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法)은 수행의 근본바탕을 이룬다. 조도품을 닦는 기본 원리는 지관(止觀)이다. 사실 지관의 원리와 방법은 불교 수행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관은 모든 수행의 기본 원리이자 방법이다. 도교와 유교의 수행법을 예로 들면 이해할 수 있다. 도교를 창시한 노자는 고요함을 생명의 근본으로 보고, 고요함으로 돌아가야 생명이 회복된다고 했다. 고요함에 이르는 방법이 바로 멈춤, 즉 지(止)다.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밝게 관찰할 수 있는 원초적 생명력이 나온다. 노자는 멈춤의 지혜를 역경(易經)에서 배울 수 있었다. 음양의 조화 속에 생명력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노자처럼 역(易)의 이치에서 도를 깨우친 공자는 주로 삶의 수행을 말했지만, 그의 내밀한 수행법은 증자에게 전해졌다. 공자의 법통을 이은 증자는 《대학》에서 지(知), 지(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 그리고 득(得)이라는 7단계 과정을 통해 도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는 지관의 수행법이 내포되어 있다. 불안한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멈춤(止)’을 통해 정(定)에 들어가야 하는데, 선정(禪定)의 정은 바로 대학에서 빌린 용어다. ‘편안함(安)’을 이룬 후에 바르게 ‘생각(慮)’할 수 있다는 대목에 관(觀)의 이치가 내포되어 있다.

 

다만 불교에서 생각이란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궁극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일체의 언어적 사고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이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비추어 봄(照見)’으로써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바로 조견(照見) 속에 ‘려(慮)와 관(觀)’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른 법으로 사유해야만,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공자는 현실적인 차원의 깨침을 말씀했다. 현실을 거치지 않고는 진리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점에서, 유교의 도학을 무시할 수 없다.

 

자 이제부터는 지관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우선 지관의 사전 작업으로, 《대학》에서 말한 7단계 수행과정의 첫 번째 지(知)가 필요하다. 우리는 뭔가를 지각해야 행동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 육근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을 만나 이루어지는 의식작용을 이해해야만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의식구조에 관한 심도 있는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고, 여기서는 우선 ‘알아차림(知)’의 의미를 설명하겠다.

 

쉽게 얘기하면, 지(知)는 정신을 차리고 현재를 인식하는 일이다. 사실 안타깝지만,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을 쓸데없는 곳에 둔 채로 시류에 휩쓸려 살다가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우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인간의 대표적인 다섯 가지 욕망, 즉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그리고 수면욕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전등화 같은 인생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수행은 그 위험의 실상을 매 순간 지각하는 일이다. 그 시작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어느 경우든 일체 행위의 알아차림이다. 보통 사띠(sati)라고 하는 수행법이 바로 지(知)의 수행이다.

 

그러나 자신의 업식(業識)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이 쉽지 않다. 따라서 뭔가 의식을 멈출 수 있는 특별한 대상을 두고 집중능력을 배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주로 하는 수행법들인 염불선(念佛禪)의 염불, 간화선(看話禪)의 화두, 염식법(念息法)의 호흡, 관음법(觀音法)의 소리, 밀교(密敎)의 주문 암송 등이 모두 마음집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는 관심법(觀心法)에서 마음이나, 지관법(止觀法)에서 지(止)의 방식 자체를 집중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을 마음집중의 방편으로 삼을지는 각자의 수행 인연이자 업연에 달려있다.

 

위에 열거한 수행 방법들은 각기 좋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 맞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화두 수행은 일상의 생계활동을 하는 재가 수행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출가 수행자는 속세의 문제를 놔두고 온종일 하나의 화두에 집중할 수 있지만, 일반 재가자는 여건상 힘들다. 물론 전문 수행자나 은퇴자는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두는 수행자의 근기나 업연에 맞게 지도사가 선정해줘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업관(業觀)을 체득한 선지식을 만나기 어렵다. 지극한 복덕을 갖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호흡 수행의 장애는 환경오염이다. 특히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호흡 수련을 할 만한 공간을 찾기 힘들다. 지방도 도시 지역은 예외가 아니다. 심호흡을 통해 보조적으로 심신을 조율하는 정도가 적당하다. 더군다나 호흡은 기(氣)의 운행과 직결되는데, 기는 인위적으로 돌리면 위험하다. 기의 흐름은 천지의 운행에 비유할 수 있다. 때가 되면 천지의 기운이 바뀌면서 돌듯이, 심신의 상태가 적절한 단계에 이르면 그에 따라 몸의 기가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면서 운행한다. 인위적인 기의 운행은 위험하다. 무엇보다 기의 수행은 결국 공(空)한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소리 수행과 주문 암송은 좋은 수행 방편이지만, 심력(心力)이 약한 사람은 환청이나 환시에 끌려다닐 수 있다. 요즘의 세태가 신비스러운 현상을 추구하면서, 특히 주문 수행이 늘고 있다. 하지만 신통에 의지하는 마음이 큰 사람에게는 이런 종류의 수행을 권하고 싶지 않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 말씀을 꺼린 것도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소한 작은 생명 활동이 모여 천지의 변화를 이끌 듯이, 수행도 마찬가지다. 오온을 정화하는 단계마다 신비한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결국 전도몽상(顚倒夢想)의 결과임을 부처님은 《능엄경(愣嚴經)》에서 특별히 강조했다.

 

관심법(觀心法)과 지관법(止觀法)은 지관의 원리를 이용해 마음을 관(觀)하는 수행법이다. 이것은 마음의 인식 작용인 ‘지(知)’를 그대로 집중대상으로 삼고, 집중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면서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관심(觀心)이란 자신의 심리상태, 즉 생리(生理)와 심리(心理)의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심신이 조화에 이르는 과정을 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고, 혼침을 불러오기 쉽다.

 

근본적인 방책은 위에 열거한 수행법 중에서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맞게 적절한 방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눈을 기르는 일이다. 그런 능력이 아직 부족한 사람에게는 염불을 권하고 싶다. 업연이 특히 복잡한 현대인에게는 염불이 가장 적당하다. 앞서 〈작복불사(作福佛事)〉 칼럼에서 이미 권한 염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효과가 높다. 염불 수행 속에는 일체의 수행법이 융합되어 있다. 부처님을 염(念)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이 이룬 수행 성취가 자신을 점검하는 화두가 되고, 소리를 내면서 자연이 호흡이 깊어지고 동시에 소리 수행이 병행되며,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관심과 지관 자체의 수행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염불은 불보살이 세운 중생 구제의 대원력과 상응하면서, 가피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염불 수행과 인연이 많다. 내가 본격적으로 수행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대상그룹의 임창욱 회장님은 청화스님의 속가제자였다. 청화스님은 평생 염불 수행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신 분이었다. 임회장님과의 인연으로 나도 100일 동안 염불한 적이 있다.

마지막 회향 차원에서 나는 설악산 봉정암에 올라가서 염불했었다. 묘하게도 그날 꿈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 설한 내용처럼 아미타부처님 일행이 나를 맞으려 다가오는 모습을 잠시나마 보았다. 더불어 꿈속에서 어떤 노스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했다. 그때는 뭔가 울림이 있는 내용이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여튼 내가 지금까지 수행 공부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염불 공덕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지금도 염불을 놓지 않고 있고, 기도의 효험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치게 기도에만 의지하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어떤 수행법을 하든지 간에, 선정을 이루는 데는 기본적으로 지관의 원리와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지(止)는 집중으로 사마타, 관(觀)은 비추어보는 일로 비바사나 또는 위빠사나라 부른다. 또한 지(止)가 강해질수록 선정이 굳건해지고, 관(觀)이 깊어질수록 지혜의 밭이 비옥하게 된다. 따라서 지관을 닦는 것을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부른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지관이란 정신을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고 그 마음을 관(觀)하는 것으로, 수정(修定)의 기본 원리다.

 

더욱 정확히, 지관을 통한 깨달음과 그 구현의 전체 과정을 정리해보자. 우리의 분별심인 ‘지(知)’를 방편으로 삼아 자신에게 맞는 집중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이 상태를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 일념(一念)이 만념(萬念)이 되는 상태에 이르면, 선정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분별의 지(知)마저 공(空)으로 만듦으로써 무념처(無念處)로 들어가게 된다. 진리를 향해 더 나아가서 모든 공(空)을 떨쳐버리면, 형용 불가한 본심(本心)이 스스로 드러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되찾은 본성에 구체적인 생명을 부여하고 기르는 보림(保任) 과정을 거쳐 공(空)에서 다시 연기를 증득하면, 진공(眞空)에서 묘유(妙有)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 의식이 없는 무기(無記)에 빠진 상태를 삼매로 생각하거나, 혹은 신비주의적 경향에 빠져 마음집중을 신통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면, 깨달음과는 거리가 크게 멀어진다. 지금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이러한 풍조와 관련이 깊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마경(魔境)이므로,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항상 새기자.

*수행문화, 인간교육 특강/컨설팅 문의(eastosuh@daum.net)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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