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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시: 2025/10/24 09:56:25  이한규
서동석 박사의 AI시대 생활불교수행(21)
대서원(大誓願)과 보살행(菩薩行)

중생이 무명(無明)의 고통 속에 있는 원인도 마음이고, 부처님의 광명(光明)을 회복하는 원동력도 마음에 있다. 부처님은 “일념 속에 팔만사천의 번뇌가 있다.”라고 말씀했다. 마음을 잘못 먹으면 모든 죄의 근본 종자인 번뇌가 되지만, 번뇌를 돌이켜 지혜의 마음을 내면 깨달음의 종자가 된다. 번뇌를 진리의 종자로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은 깨달음의 서원과 보살행에 있다. 위 없는 평등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희망 사항이 아닌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어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서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깨달음의 이치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보살행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보완을 이루며 하나가 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보살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보살인 이치도 여기에 있다.


반야의 대지혜(大智慧)와 대자비(大慈悲)의 문을 여는 길은 번뇌가 들끓는 일상의 삶 속에 있다. 일상의 삶을 떠나서 보리(菩提)를 구하는 것은 허공에서 양식을 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많은 수행자가 일상을 떠나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수행법을 찾아 헤매고 있다. 수행의 근본이 대서원과 보살행에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의식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수행도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렸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늘 헤매지만, 언제나 허상과 공허함이 몰려올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무명의 삶을 광명의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것은 번뇌의 종자를 깨달음의 종자로 바꾸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다. 욕망을 추구하는 업(業)을 깨끗하게 정화할 때, 수행의 동력을 크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마친 수행자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와 일체종지를 증득하는 과정인 만행(萬行)이 필요하다. 수행을 완성하는 실질적인 동력은 일상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이 의식의 상승이나 완성을 위해 사바세계로 돌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부분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 바로 달마대사다.


우리는 보통 달마대사를 선종(禪宗)을 창시한 인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달마대사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화두 중심의 선(禪) 수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달마대사가 전하고자 한 수행의 중점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바른 이치를 익히는 수행의 길이 이입이고, 바른 행위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행입이다. 선의 진정한 중심은 달마대사가 제시한 행입이었다. 바른 이치와 바른 행위가 하나로 융합되고 수행력이 무르익을 때, 참선의 효과가 나온다. 심신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고 탁한 상태에서 화두 수행으로 진리를 구하는 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는 9년 면벽수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달마대사는 새로운 어떤 것을 깨닫기 위해 수행한 것이 아니라, 수행의 참된 이치를 전할 시절 인연을 기다린 것이다. 후에 선종의 2대조로 평가되는 혜가(慧可)가 찾아왔을 때, 달마대사가 그를 제자로 삼은 연유는 왼팔을 잘라 보인 그의 진심에 있었다. 대도(大道)를 구하는 그의 마음이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원동력이다. 달마대사는 혜가의 행위에서 도(道)를 전할 인연을 보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대서원을 세워야 한다. 대서원에서 진리의 행(行)이 나오기 때문이다. 혜가의 경우처럼 구도의 진실한 마음을 내면,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몸과 마음과 삶 속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행(行)과 원(願)이 상호작용하면서, 지혜의 밭을 일구게 된다. 수행이 익으면 행원(行願)은 하나로 작용하지만, 처음에는 서원이 행위를 일으키고 행위의 작용을 통해 서원의 뜻은 더욱 굳건해진다.


행원을 대표하는 보현행(普賢行)은 보살의 역할과 궁극적 지향점을 알려준다. ‘보현’이란 말 속에는 일체중생과 하나가 되는 자비와 지혜의 능력이 함축되어 있다. 일체의 분별과 아집을 없앨 때, 존재와 현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보현행이 가능하다. 보살의 삶에서는 행원의 추진력이 스스로 우러나오므로, 보현행은 가장 실질적인 무아(無我)의 수행이 된다. 따라서 행원을 늘 되새기며 보살을 닮아가는 노력은 그 어떤 수행법보다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염불(念佛)의 진정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 불보살의 행원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 거룩한 삶을 본받으면, 언젠가 깨달음의 시절 인연이 오게 되는 법이다.


보현행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수행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서원과 보살행을 통해 나와 남이 더불어 이익되는 사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인격은 성숙하고 공동체의 문화는 조화를 이루며 융성하게 된다. 수행문화가 일상의 삶에 녹아들면, 모든 영역의 폐쇄적인 경계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종교의 형식적인 경계도 점차 사라지고, 보편적인 정신문화가 모든 종교를 관통하고 융합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역사상 큰 발전을 이룬 나라를 보면, 나라의 기운을 바로 잡는 정신문화가 먼저 나라의 풍속을 안정시킨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신문화의 기운이 사그라지면, 대제국도 예외 없이 풍속이 타락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의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이 20세기에 세계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한 원동력은 19세기에 에머슨과 그를 따르는 초절주의자들이 동서를 아우르는 정신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데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발전한 물질문명으로 풍속이 점차 타락하면서, 지금 미국은 보편정신을 망각하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기존의 세계질서는 무너지고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세상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보현행의 정신이다. 인류문화를 하나로 통섭하는 보편정신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AI문명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보편정신을 융합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보편정신을 깨우고 추진동력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뭔가 특별하고 강력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인간의 뇌는 동기부여가 클수록 반응도 크게 보이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절에서 천도재나 생전예수재 등과 같은 특별한 행사를 거행하는 본질적인 취지도 의식을 깨우는 데 있다. 이런 행사를 통해 단순히 복을 빌기보다는 수행의 의지를 강건하게 다질 때, 인생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 같은 차원에서, 시대정신을 새롭게 전환하는 데도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신문명사회의 파동을 일으킬 정도의 ‘영적 공명’이 요구된다.


AI시대에는 과학이 영성과 하나로 수렴할 것이다. 나는 보편적 수행의 도리를 갖춘 과학기술자가 앞으로 AI 문명을 이끌 주역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여러 과학기술원에서 AI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인문학, 공연예술 등을 교육 과정에 도입해서 과학도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이론이나 즉흥적인 문화콘텐츠 등으로 현상적인 융합에 치중하고 있다. 정신문화를 중심에 두고 현상과 본질 양면에서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시도가 본격화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문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융합하는 일이 가장 바람직하다.


물질적 편의나 이익에만 연구가 집중된다면, 인류의 장래는 암담하다. 물질과 정신을 통섭할 수 있는 중도적 시각을 갖춘 과학자가 보살의 정신으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때, 인류사회는 안정적인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AI시대를 대비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인간교육과 수행문화의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왔다. 우리가 교육과 문화를 통해 과학과 영성을 융합하는 보편적 도리를 추구하면, 우리나라는 AI 문명사회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 한류의 세계적 흐름을 잘 이용하면 가능한 일이다.

수행에 관한 이론적인 논의는 앞으로도 여러 영역에서 되겠지만,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은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통섭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정신문화를 융합하는 일이다. 사회제도나 법률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심층적인 정신문화가 중심을 잡을 때, 표면으로 드러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존엄한 삶과 죽음에 관한 보편적인 정신문화가 균형을 이룰 때, 사회 모든 영역에서 표출된 심각한 불균형을 조율할 수 있다.


AI시대에는 양자물리학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하나로 통섭하는 메커니즘이 일상생활과 첨단기술에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시대 흐름을 선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을 늘 새롭게 깨우는 수행이 생활화될 수밖에 없다. 변화가 일상인 시대에서는 끊임없이 균형을 조율하는 무아(無我)의 삶이 필수적이다. 어떤 성과에 안일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이제 세상은 단순히 꿈꾸는 세상에서 꿈을 실현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에 따라 인류의 문명은 달라진다. 앞으로는 물질의 주인이 되는 정신을 깨우고, 끊임없이 삶을 혁신하는 사람만이 존엄한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은 신을 섬기는 시대에서, 신의 능력을 지닌 신인(神人)이자 인간보살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존재가 지닌 시공의 관계적 공시성(共時性)과 시공을 초월한 통시성(通時性)을 동시에 의미하는 보현행이 수행의 중심과제로 부상할 것이다. 보편적 도리에 의한 삶의 수행이 지구의 한계를 깨고, 우주 시대를 여는 핵심열쇠다. 보현행은 모든 생명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화엄의 세계를 구현하는 원동력이다. 

*수행문화, 인간교육 특강/컨설팅 문의(eastosuh@daum.net)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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