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말하면, 대부분 사람은 마음집중을 통해 선정을 얻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마음집중은 수행의 시작에 불과하다. 부처님이 모든 외도(外道)를 물리친 근본적인 차이점은 선정이 아닌 위 없는 지혜였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다. 누차 강조했듯이, 진리를 추구하는 바른 뜻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보살행이 반야의 지혜를 완성하는 양대 축이고, 각종 수행법은 이 둘을 견고하게 지탱하는 가로대와 같다
대부분 수행자는 관념적 환상에 불과한 것을 찾고 의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은 모두 예외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진리를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진리는 생동하는 본질이다. 따라서 동적(動的)인 수행이 필요하다. 물론 좌선(坐禪)과 같은 정적(靜的)인 수행도 중요하다. 다만 좌선은 고요함 속에서 생명력을 회복하는 데 핵심이 있다.
마음집중을 통해 들어가는 지극히 고요한 경계가 수행의 목표라면, 불도는 외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표현과 방법은 달라도 그런 경지는 외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외도는 그 상태에서 찾은 절대적 존재나 이치에 따라서 사는 것에 수행의 목적이 있다. 그러나 불도는 일체에 매임이 없는 지혜를 증득(證得)하고, 그 지혜를 통해 모든 중생과 함께 하는 삶에 중점이 있다.
여기서 《능엄경》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새길 필요가 있다. 선정 수행의 단계를 설법한 이 경전은 오음(五陰)의 마지막 단계인 식음(識陰)이 모두 청정해져도, 그 근본은 전도몽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정만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고, 바른 뜻을 실천하는 행원(行願)에서 반야의 대지혜는 발현된다. 과거불인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삼매의 경지에서 십겁(十劫)을 도량에 앉아있어도 불도를 이룰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의 특징은 고정된 실체를 추구하지 않는 데 있다. 진리의 이치는 불변하지만, 진리의 발현은 유동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의 핵심이 무아(無我)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완전한 자유는,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닌, 생명의 유동성 속에서 걸림이 없는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생동하는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수행의 요점이다. 하지만 현재 삶의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은 거의 뒷전에 있다. 대부분 뭔가 신통한 경계를 얻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명상이나 특별한 의식에 열중하고 있다.
진리는 어떤 진공상태에서 찾으려고 해도 찾아지지 않는다. 진리는 영원히 머물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기에, 진리는 신비한 경계를 지니지도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모습이나 음성으로 진리의 실상인 여래를 구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금강경》이 불교계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경전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신비한 경계의 얘기를 하거나 듣기를 좋아하는 수행자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동적인 수행의 도리를 체득하기 가장 좋은 수행법은 팔정도(八正道)다. 팔정도를 현대적으로 설명하면 몸, 마음, 삶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행위를 닦는 일이다. 삶의 도리를 닦으면, 몸과 마음을 통합한 생활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일체 생활방도와 생산이 모두 실상과 어긋나지 않는다(一切治生産業, 皆與實相, 不相違背).”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에서 삶의 도리를 닦는 일은 온전한 지혜를 체득하는 바른길이다. 육조 혜능도 세간을 떠나서 불도를 깨달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앞선 칼럼에서 나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이 팔정도로 수렴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더라도, 도리 수행에서 매우 중요하므로 확실하게 정리하는 차원에서 팔정도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관계, 그리고 도리를 체득하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도리를 닦는 데도 단계가 있다. 바른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목적지를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그 설정이 바로 바른 뜻이다. 바른 뜻은 진리로 안내하는 좌표와 같다. 수행의 목적을 진리의 증득에 두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뜻을 바로 세운 다음에는, 진리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심신의 독소, 삶의 현상적 인과와 잠재된 업인(業因) 등을 깨끗하게 소멸시키는 수행이 포함된다.
장애 요소들의 제거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육체와 분별의식의 집합체인 오온(五蘊)에 갇혀 있다. 따라서 그 한계에서 벗어나는 기본요건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정견(正見)이다. 생명작용, 의식의 체계와 흐름, 그리고 세상의 현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함양해야 한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먼저 상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수행이 필요하다. 감각, 감정, 이성은 모두 상대하는 대상과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관계를 청정히 하는 일을 지속한다. 이것은 십이연기(十二緣起) 중에서도 특히 명색(名色) 이하에서 필요한 수행이다. 팔정도에서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그리고 정명(正命)의 수행이 이와 직결된다.
일상에서 직관을 함양하는 최고의 방법은 보편적인 도리에 맞는 삶이다. 도리 수행은 달마대사가 강조한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동시에 닦는 수행이다. 도리에 맞게 생활하면, 몸과 마음이 청정해진다. 독소가 쌓이는 원인은 도리에 맞지 않게 몸과 마음을 쓰는 데 있다. 또한, 바른 도리의 삶은 인연에 부합하는 지혜와 복덕을 가져온다. 지혜와 복덕을 먼 곳이나 대상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생각, 말, 행동을 도리에 맞게 하자. 바른 도리로 생계를 유지하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지혜가 우러나온다. 도리의 삶이 지혜 광명에 이르는 첩경이다.
삶의 도리가 완성되면, 모든 상대성의 경계를 초월해서 본심을 향한 수행이 가능하다. 물리적 경계의 수행이 인과의 수행이라면, 업(業)의 근본 종자를 소멸시키는 수행은 인연의 수행이다. 삶의 도리 수행은 깨달음의 연기적 사고로 전환하는 통로다. 명색의 단계를 넘어 물리 세계의 상대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식(識), 행(行), 그리고 마지막 무명(無明)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혜 광명(光明)을 회복하려면,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그리고 정정(正定)을 강화하는 집중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팔정도 전체가 단계적으로 상호 보완되며 상승하는 과정을 통해 정견(正見)으로 대원환을 이룬다. 수행의 시작은 정견의 함양이고, 수행의 끝은 정견의 완성이다.
팔정도 수행에 있어서 십이연기의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십이연기는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윤회의 핵심이 십이연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윤회의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많지만, 윤회의 본질은 바로 십이연기의 업력(業力)이다. 오온이 십이연기 안에서 맴돌고 있다면, 윤회하는 삶이다. 반면에 십이연기와 오온의 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윤회에서 자유로운 니르바나의 삶이 된다.
우리는 지나치게 서양의 인과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다. 불교 수행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관념적으로 어떤 현상을 이해해서 설명한다고, 그 현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관념적 사고는 끝없는 선형적 모순을 일으키는 메마른 지식을 양산할 뿐이다. 물리적 인과의 이해와 본연적 인연의 실천이 다른 점은 모순을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겠다. 인과적 사랑에서는, 적을 사랑할 수 없다. 적대적인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인과의 논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원적인 인연의 사랑에서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인연법(因緣法)에 따라 십이연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무명을 밝히면, 모든 생명의 평등한 존엄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의 삶은 논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지나치게 인과적 물질세계에 함몰되면,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십이연기의 순환 속에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반대로 모든 사람이 일상의 삶을 도외시하고 외딴곳에서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 수도 없다. 따라서 중도의 이치를 삶과 수행에 모두 적용해야 한다. 학문적으로 용어의 선택이 다를지 모르지만, 현상의 중도와 본질의 중도실상은 하나로 통한다.
관념적 언어의 도움으로 수행에 입문하고, 관념을 떠난 무아로 수행을 완성한다. 따라서 물리적 인과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전환하는 데는 양면적 수행이 동시에 필요하다. 윤회에 관한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무아의 삶을 실증하는 데 집중하는 쪽이 현명하다. 물리적 인과와 본연의 인연을 연결하는 다리는 중도의 도리다.
삶의 양극적 모순이 지닌 거친 흐름을 조화하는 중도의 도리를 통해 최종적으로 깨달음의 연기적 직관으로 전환할 수 있다. 비선형적 직관으로 논리의 모순을 초월하고 십이연기를 역행해서 본심(本心)으로 돌아간다. 인연의 수행을 통해 감각, 감정, 관념 이전의 직관을 회복하는 본원적 수행을 완성한다. 무아의 삶은 머물지 않는 중도의 동적 사고에서 구현된다. 다만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흐름의 중심을 잡는 힘은 바른 뜻이다. 초발심(初發心)의 바르고 확고한 의지가 정등각(正等覺)에 이르는 이치도 이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연의 수행이 진정한 도리를 닦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나는 융합 수행시스템을 꾸준히 제안해왔다. AI 시대에 존엄한 삶을 위해, 팔정도의 도리 수행에 최적화된 수행공간과 생활 수행시스템의 개발과 보급이 절실하다. 그 준비작업으로 먼저 8가지 바른 도리를 활용한 다양한 인간교육 및 수행 프로그램을 실습하고 바른 생활습관, 즉 정업(正業)을 이루는 특별한 모델링을 본격적으로 할 때가 왔다. 모델링을 통해 모든 종교를 통섭하는 보편적인 수행문화와 시스템을 지역이나 기업의 특성에 맞게 조율해서 널리 확산하면, 사회의 건강과 평화, 그리고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이 작업은 일상의 생활 수행과 사찰의 전문 수행을 연결하고, 양쪽 모두에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다.
*수행문화, 인간교육 특강/컨설팅 문의(eastosuh@daum.net)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