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의 틀로 첨단 기술과 인간의 고통·자아·깨달음 성찰
해인사 출신 철학 박사, “더 강력한 기술보다 깊은 지혜 필요”
붓다, 포스트휴먼에 답하다
보일 지음
운주사
24,000원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컴퓨터에 옮기고, 뇌와 기계를 연결하며, 생명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기술도 더 이상 공상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육체를 떠나 디지털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을까. AI가 인간처럼 의식을 갖고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은 있을까.
『붓다, 포스트휴먼에 답하다』는 AI와 첨단 과학기술이 던지는 질문을 2,600년 전 붓다의 가르침과 마주 세운 책이다. 마인드 업로딩과 디지털 영생,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알고리즘과 자유의지, AI의 의식과 불성, 수명 연장,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AI 스승 등 16가지 주제를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따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술이 인간의 삶과 존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책을 관통하는 물음은 ‘기술은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가’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노화와 질병,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살기를 꿈꿔 왔다. 마인드 업로딩으로 뇌의 기억과 성격, 사고방식을 데이터화해 컴퓨터에 옮긴다면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의식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죽지 않는 것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짚는다.
불교에서 괴로움의 근원은 늙고 병들고 죽는 육체에만 있지 않다. 무명과 갈애, 변하지 않는 ‘나’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 육체를 디지털 존재로 바꾸거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하더라도 근본적인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새로운 집착이 될 수 있다.
책의 구성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의 체계를 따른다. 1부에서는 마인드 업로딩과 가상세계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2부에서는 디지털 복제본의 자아 동일성과 인간 의식과 AI 의식의 차이를 묻는다. 3부는 디지털 의식의 깨달음과 열반이 가능한지, 기술로 자비를 구현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선정 알고리즘이 수행을 대신할 수 있는지, AI 로봇이 스님이 되거나 AI 스승이 불법을 전수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사성제를 단순한 교리의 틀이 아니라 기술문명의 미래를 가늠하는 철학적 나침반으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나’를 복제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뇌를 완벽하게 스캔해 기억과 성격까지 똑같은 디지털 존재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원래의 육체가 죽은 뒤 복제본이 활동한다면 그것은 내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사상은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은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오온의 변화와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존재이며, 의식 역시 조건에 따라 이어지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술적 복제의 성공 여부를 넘어 ‘무엇이 나인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으로 돌아간다.
AI가 스님이 되거나 인간에게 불법을 가르칠 수 있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AI는 방대한 불교 경전을 학습해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개인의 상황에 맞는 수행법을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번뇌를 직접 겪으며 수행을 통해 깨닫는 일은 다르다. AI가 유용한 수행의 조력자가 될 수는 있어도, 지식의 축적이 곧 깨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전하는 존재가 인간인지 기계인지보다 그 가르침이 실제 삶과 마음속에서 구현되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AI 기술의 윤리적 쟁점을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으로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인 시절부터 ‘인공지능 로봇에도 불성이 있을까’라는 화두를 품고 불교와 첨단 기술의 접점을 탐구해 왔다.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종책연구위원장과 AI부디즘학술원장을 맡고 있다.
인간과 기계,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되더라도 인간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무아와 연기, 자비와 지혜라는 오래된 가르침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책은 AI 시대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 더 강력한 기술인지, 아니면 기술의 방향을 바로잡을 더 깊은 지혜인지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