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 “우린 받기만 했다”…추도사에 곳곳 오열
“용산·세월호·쌍용차…중생의 고통이 곧 스님의 고통”
종단 갈등·국가 비판에도 ‘행동하는 수행자’로 남아
법주사 다비 뒤 민주열사묘역 안장…정신은 시대에 남아
25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봉은사 대웅전 앞마당. 한여름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공기 속에서 맑고 깊은 종소리가 다섯 번 울려 퍼졌다. 검은 상복과 흰 국화가 뒤섞인 자리, 고(故) 명진 스님의 영정 앞에 선 이들은 두 손을 모은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날 영결식은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엄수됐다. 세수 76세, 법랍 52년. 명진 스님은 지난 22일 제주 서귀포 하예포구 인근 바다에서 수영 중 사고로 입적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봉은사 경내는 이른 아침부터 추모 인파로 가득 찼다. 체감온도 31도의 무더위 속에서도 약 1500여 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가장 먼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 정부자 씨였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목소리는 몇 차례나 끊겼다.
“우리는 스님께 너무 많은 사랑을 받기만 했습니다. 그 사랑을 돌려드릴 시간조차 없다니….”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끝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어갔다. “스님께서는 ‘견뎌야 진상규명을 하고 안전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대신 나쁜 놈들한테 욕해주마’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흐느낌이 번졌다.
이날 영결식에는 불교계는 물론 개신교·천주교 등 타 종교 인사들까지 대거 참석했다. 함세웅 신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관계자, 문화예술계 인사들, 정치권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종단 내부 인사와 정치권, 시민사회가 한 스님을 기리기 위해 함께 모인 풍경은 이례적이었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도공 스님은 영결사에서 “명진 스님은 시대를 진단하고 행동의 길을 제시한 수행자였다”고 했다. 이어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쌍용차 사태… 그 모든 고통이 곧 스님의 고통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명진 스님의 삶은 ‘거리의 수행’으로 요약된다. 선방에서의 정진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현장을 수행처로 삼았다. 노동 현장, 철거민 농성장, 유가족의 곁에서 그는 늘 같은 자세였다. 강자에게는 거침없이 맞섰고, 약자에게는 끝까지 손을 내밀었다.
염무웅 전 국립한국문학관장은 그를 “제도와 관행에 갇히지 않은 자유인”으로 기억했다. “정권의 탄압과 종단의 만류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곁으로 달려갔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했습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명진 스님의 삶의 전환점을 1985년으로 짚었다. 해인사에 몸을 숨긴 학생들을 통해 5·18의 참상을 접한 뒤, 그는 선방을 나와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후 민주화 운동과 종단 개혁, 노동·인권 현장을 오가며 ‘행동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봉은사 주지 시절 종단과 갈등을 빚었고, 정치권 외압 의혹을 제기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현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국가정보원의 불법 사찰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17년에는 종단으로부터 제적 처분을 받았지만, 결국 법정에서 징계 무효 판결을 받아 승적을 회복했다.
함세웅 신부는 이날 추도사에서 “명진 스님은 바다에서 돌아가셨다”며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스님은 그런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어 “한국 불교도 개혁과 포용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결식은 종교 의례를 넘어 하나의 ‘시대의 장례식’ 같았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추도시 ‘영산의 춤’을 낭독했고, 소리꾼 장사익은 노래로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봉은사 합창단의 조가가 흐르는 동안, 참석자들은 차례로 국화를 내려놓았다.
영결식이 끝난 뒤 스님의 법구는 출가 본사인 충북 보은 법주사로 운구됐다. 이날 오후 다비식이 엄수됐고, 이후 49재를 거쳐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명진 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의 중심에 섰고, 이후에도 종단과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봉은사 주지 시절에는 사회복지와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수행자이자 개혁가, 그리고 거리의 벗이었다. 그러나 이날 봉은사 마당에서 흘러나온 한 문장이 그를 가장 또렷하게 설명했다.
“중생의 고통이 곧 스님의 고통이었다.”
불길 속에서 육신은 사라지겠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수행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불교는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명진 스님의 빈자리는 그 물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 49재 추모 일정
▲ 초재 2026년 8월 28일 (금) 강남 봉은사 오전 11시
▲ 2재 2026년 9월 4일 (금) 문경 봉암사 오전 10시
▲ 3재 2026년 9월 11일 (금) 보은 법주사 오전 10시
▲ 4재 2026년 9월 18일 (금) 강화 보문사 오전 10시
▲ 5재 2026년 10월 25일 (금) 인제 용화선원 오전 10시
▲ 6재 2026년 10월 2일 (금) 괴산 공림사 오전 10시
▲ 49재 2026년 10월 9일 (금) 강남 봉은사 오전 1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