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와 알고리즘이 부추기는 자기착취와 사회적 적대
혐오를 넘어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우정의 정치학’
“존중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회는 결국 모두를 외톨이로 만든다.”
『피로사회』로 현대인의 번아웃을 시대의 징후로 읽어낸 철학자 한병철이 신간 『존중 없는 사회』(간디서원)에서 다시 한번 현대 문명의 위기를 진단한다. 경쟁과 성과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추적하는 책이다. 존 롤스, 칸트, 한나 아렌트 등 다양한 사상가의 논의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불안과 혐오, 고립이 형성되는 구조를 해부한다.
한병철이 주목하는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존중마저 시장의 논리에 종속됐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기보다 성과와 부, 지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존중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경쟁에서 얻어내야 할 보상이 됐다.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개인은 타인을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바라보고, 성공한 사람조차 추락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성과는 사람을 고립시키고 정의는 사람을 연결한다”고 강조한다. 승자독식 구조에서 실패한 사람은 자기혐오와 분노에 빠지고, 성공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 불안은 특정한 대상이나 원인 없이 타인을 향한 적대감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번진다. 한병철이 ‘분자적 내전’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사회적 갈등이 개인의 내면까지 파고들며 일상적인 불안과 공격성을 키운다는 진단이다.
디지털 기술은 이러한 악순환을 더욱 심화한다. 소셜미디어는 존중의 척도를 ‘좋아요’와 팔로워 수로 바꾸고, 이용자가 스스로를 전시하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은 명령이나 강압 대신 자발적인 클릭과 공유를 통해 행동을 예측하고 관리한다.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개인은 보이지 않는 통제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감시가 눈에 띄지 않을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진다.
공론장의 변화 역시 책의 주요한 문제의식이다. 과거 공적 공간은 적절한 거리와 예의를 지키며 낯선 타인과 공존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공론장은 개인의 감정과 사적인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으로 변했다. 의견 차이는 정체성의 충돌로 이어지고, 상대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적이 된다. 익명성과 정보의 편향은 이러한 적대감을 더욱 키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현대 사회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만으로 존중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와 형식, 적절한 거리 두기가 서로를 보호하고 공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공유하는 온라인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책은 비판에 머물지 않고 ‘우정의 정치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친구란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이며, 공동체는 그 차이를 지우는 대신 인정할 때 형성된다는 것이다. 경쟁보다 경청을, 적대보다 존중을 앞세우는 태도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조건이라는 주장이다.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한병철은 『피로사회』 이후 기술과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온 문명비평가다. 이번 책에서도 짧고 압축적인 문장과 시적인 문체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
『존중 없는 사회』는 사람들이 왜 쉽게 혐오하고 끊임없이 불안해하는지 개인의 성격이나 도덕성보다 사회 구조와 기술 환경에서 답을 찾는다. 서로를 경쟁자로만 바라보는 시대에 존중은 사치가 아니다.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자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토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