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국토부터 백제의 미륵 세계까지… 잊힌 사찰에 깃든 민초들의 염원
40여 년 도보 답사가 길어 올린 인문학… 폐허에서 시간과 삶, 기억의 의미를 묻다
사라진 옛 절터
신정일 지음
디오네
25,000원
한때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깨달음을 구했던 사찰. 나라의 안녕을 빌고 가족의 무사함을 기원하던 그곳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취를 감췄다. 웅장했을 법당도, 수행하던 스님들의 거처도 사라졌다. 지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돌탑 하나와 무너진 축대, 잡초 사이에 드러난 주춧돌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그 풍경 속에는 오히려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이 신간 『사라진 옛 절터』(디오네)에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폐허의 기억이다. 40여 년 동안 전국의 산과 강, 옛길을 걸으며 우리 땅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해 온 저자는 강원도에서 충청도까지 전국의 폐사지 30여 곳을 찾아간다. 남겨진 탑과 승탑, 석등과 불상, 비석과 주춧돌을 살피며 사라진 사찰의 역사를 되짚는다. 단순한 문화유산 답사기가 아니다. 돌 하나에 새겨진 시간을 더듬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믿음과 염원, 그리고 인간의 삶과 소멸에 관한 질문을 길어 올리는 인문기행이다.
폐사지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은 사찰과 다르다. 건물의 형태를 살피며 당시의 생활상을 확인하기 어렵고, 문헌 기록마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남겨진 흔적은 적지만, 그만큼 작은 단서 하나가 품은 의미는 크다. 무너진 석축과 흩어진 기왓장, 홀로 남은 석탑을 통해 독자는 한때 그곳을 채웠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저자는 눈앞의 풍경을 역사적 사실과 지명, 전설에 비춰 살피며 잊힌 가람의 모습을 복원해 나간다.
책은 지역별로 구성됐다. 강원도에서는 산과 계곡에 스며든 불교문화와 고승들의 흔적을 찾아가고, 경기도에서는 번성했던 사찰의 흥망성쇠를 살핀다. 신라의 역사가 짙게 밴 경상도에서는 불국토를 꿈꾸며 절과 탑을 세웠던 사람들의 염원을 되짚는다. 전라도에서는 백제가 꿈꾼 미륵의 세계와 문화유산이 겪은 훼손과 수탈의 역사를 마주한다. 충청도에서는 사라진 왕국과 옛 가람의 자취를 따라가며 석탑과 불상에 남은 역사의 궤적을 더듬는다.
각 절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풍경을 품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공통된 질문이 흐른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가.
경기 양주 회암사지는 한때 얼마나 장엄한 사찰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터에 이르면 웅장한 석축과 500여 개가 넘는 주춧돌이 눈에 들어온다. 발굴을 통해 드러난 치밀한 건물 배치와 규모는 이곳이 당대의 손꼽히는 대가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건물이 사라졌지만, 땅 위에 남은 돌들은 옛 사찰의 위용을 묵묵히 증언한다. 저자는 그 흔적을 통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돌아본다.
전북 완주 봉림사지에서는 문화유산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만난다. 이곳에 있던 석등과 오층석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가 자신의 정원을 꾸미기 위해 군산의 농장으로 옮겨 갔다. 해방 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유물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옛 농장 터에 들어선 학교 안에 남아 있다. 사라진 절터를 걷는 일은 단지 옛 문화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이 훼손됐고,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전남 화순 운주사지에 관한 대목은 폐사지가 품은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이곳의 석탑과 석불은 화려하거나 위엄 있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투박하고 소박한 조형물들은 오히려 고단한 삶을 살아온 민중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책에 소개된 한 어린이의 말이 인상적이다. 운주사의 부처를 보고 “백성들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한마디에서 기존의 역사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읽어낸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품었던 소망과 고통도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새롭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폐사지의 풍경을 문학과 철학의 언어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불교 경전과 선승의 가르침은 물론 이백, 보들레르, 페소아, 푸시킨, 카프카, 니체, 비트겐슈타인, 이문구 등의 문장이 각 장의 문을 연다. 시대와 문화권이 다른 사상가와 작가들의 문장은 폐허와 소멸, 인간의 의지와 시간에 대한 사유를 오래된 절터의 풍경과 겹쳐 놓는다. 독자는 유적의 연대와 건축적 특징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과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저자 신정일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대표로, 한국의 10대 강과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 옛길을 답사하며 우리 땅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온 도보 답사의 선구자다. 해파랑길과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조성에도 힘을 보탰으며, 100여 권의 저서를 통해 길과 역사, 문화유산의 이야기를 전해 왔다. 이번 책에서도 오랜 답사 경험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을 넘어 장소에 깃든 시간의 결을 읽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칼럼니스트 조용헌은 추천사에서 폐사지의 풍경을 ‘공(空)’의 미학으로 해석한다. 도시의 건물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지만, 폐사지는 비어 있는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 빈 공간은 더 채우고 더 성취하려 애쓰는 현대인에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문화유산 전문 언론인 김태식 역시 저자의 답사를 두고 절터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강조한다.
폐사지는 소멸의 현장이면서 기억이 다시 시작되는 장소다. 천년을 견딘 석탑 앞에서는 한 사람의 생이 얼마나 짧은지 실감하고, 흔적조차 희미한 절터에서는 한 시대의 번영도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남겨진 돌을 통해 과거를 상상하고 잊힌 사람들의 삶을 되살리는 순간, 사라진 시간은 현재와 다시 연결된다.
『사라진 옛 절터』는 옛 절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 오늘의 삶을 되묻는다. 우리가 지금 쌓아 올리는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끝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폐사지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는 그 질문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비어 있는 절터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