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붓과 먹의 농담으로 구현한 ‘형상 없는 경계’
선종의 깨달음과 현대미술의 접점 탐구… 왕유의 시를 풀어낸 대표작도
동국대 명예교수이자 미술사학자… 수묵화의 현대적 가능성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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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간운기(坐看雲起), 화선지에 수묵, 144X362cm, 2026 |
형태를 그리지 않고도 형상을 드러낼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형상과 비형상의 경계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수묵화가 김대열의 작품 세계가 전시로 펼쳐진다.
수묵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선종의 깨달음과 현대적 조형 언어의 접점을 탐구해 온 김대열 작가가 28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내 세종뮤지엄갤러리에서 개인전 ‘무상지경(無象之境)’을 연다. ‘형상 없는 경계’를 뜻하는 이번 전시에는 최근작 30여 점과 이전 작품 40여 점 등 모두 70여 점이 출품된다. 반세기에 걸친 화업을 돌아보는 동시에, 수묵이라는 오래된 매체가 오늘날 어떤 정신적·미학적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지 살펴보는 자리다.
김 작가의 화면에는 산과 물, 나무처럼 대상을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거의 없다. 대신 크고 작은 먹의 흔적과 농담의 변화, 빠르게 지나간 붓질이 화면을 채운다. 얼핏 보면 추상적인 먹의 자취지만, 시선을 오래 두면 형상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미묘한 감각이 떠오른다. 관람객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내기보다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현상과 공(空)이 둘이 아니라는 선종의 관점을 시각화한다. 눈앞에 드러난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말과 글로 진리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한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정신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낸 셈이다.
작품을 만드는 방식도 독특하다. 김 작가는 원통 지름이 약 10㎝, 붓털 길이가 약 20㎝에 이르는 초대형 붓을 사용한다. 붓에 먹을 묻혀 단숨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일필휘지의 운필은 우연과 직관, 작가의 의지가 맞물리는 순간을 드러낸다. 물과 먹의 농담은 붓의 속도와 힘에 따라 달라지고, 한 번 지나간 흔적은 화면에 고유한 리듬과 공간감을 남긴다. 절제된 먹빛과 여백은 소쇄하고 담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에게 대형 붓은 단순히 강렬한 효과를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는 이를 “직관의 예술 감정 혹은 선적 체험을 단순하고, 개괄적으로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도구”라고 설명한다. 붓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보다 그 순간 드러나는 필묵의 미묘한 변화와 암시적 효과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화면에 남은 먹의 흔적은 작가의 내면을 비추는 동시에 관람객이 자신의 감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통로가 된다.
대표작 ‘좌간운기(坐看雲起·앉아서 구름 이는 곳을 바라보다)’는 중국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 ‘종남별업(終南別業)’에서 출발한다.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시구의 정취를 수묵의 움직임으로 옮겼다. 복잡한 묘사 대신 지(紙)·필(筆)·묵(墨)이라는 단순한 재료와 기법으로 몰입의 경지를 드러낸다. 빠르게 번지는 먹과 비어 있는 공간이 어우러지면서 화면은 구체적인 풍경을 넘어 사유의 장소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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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광설(長廣舌), 한지에 수묵, 135 x 330cm, 2026 |
이번 전시는 앞선 작업인 ‘상외지상(象外之象)’, ‘대상무형(大象無形)’, ‘무상유상(無象有象)’에서 이어지는 탐구의 연장선에 있다. 형상 바깥의 형상을 찾고, 큰 형상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동양의 미학적 사유를 수묵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선종의 화두를 공부하고 간화선 수행을 경험한 작가는 ‘그대로 있음’과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를 함께 화면에 담으려 한다.
1952년생인 김대열은 동국대 예술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국립대만사범대학 대학원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해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이자 중국 남개대 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한벽원미술관에서 제20회 개인전 ‘무상, 유상’을 열었으며, 국내외 단체전에 300여 회 참여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고려대박물관, 동국대, 성균관대박물관, 수덕사 선미술관, 대만사범대 미술관 등 여러 기관에 소장돼 있다.
작품 활동과 함께 미술사 연구도 이어 왔다. 학술 논문 50여 편을 발표하고 『선종사상과 시각예술』을 비롯한 학술서 4권을 펴냈다. 전통 수묵화의 재료와 기법을 고수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달라진 현대인의 삶과 감각을 동시대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려는 것이 그의 작업 방향이다.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를 성찰하며 선과 명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흐름 속에서 수묵의 정신적 가치를 다시 묻고 있다.
김 작가는 2023년 작업 노트에서 “붓다는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형상이 형상 아님을 알 때 곧 진여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며 “형상 아님을 알아차려 ‘참나’를 찾아야겠다. 예무지경(藝無止境)이다”라고 적었다. 예술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그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습만이 아니다. 형상의 경계를 넘어 자신을 들여다보고, 무한한 내면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