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영산재, 삼존불 괘불 아래 범패·바라춤으로 장엄한 법석
우산과 우의 속 시민들 자리 지켜…궂은 날씨에도 의식과 공연 끝까지 이어져
노브레인·체리필터·럼블피쉬·크랙샷 출연…젊은 스님들과 록밴드 협연
상진 스님 “전통과 현대, 종교와 세대 넘어 화합하는 장”…대중과 소통하는 불교문화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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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불교태고종은 10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 특설무대에서 ‘제5회 태고종 영산재 및 태고락(樂) 페스티벌’을 봉행했다.(사진=태고종) |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을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 아래 빗줄기는 무대를 적시고, 바람은 우산을 뒤집을 듯 몰아쳤다. 그러나 삼존불 괘불 앞에서 울려 퍼진 범패는 멈추지 않았다. 붉은 가사와 장삼을 수한 스님들은 빗속에서도 의식을 이어갔고, 우산과 우의를 쓴 시민들은 자리를 지켰다. 장엄한 불교 의례가 끝난 뒤에는 록 음악의 강렬한 선율이 광장을 채웠다. 비에 젖은 광화문은 잠시, 전통의 법음과 현대의 함성이 한데 어우러지는 거대한 야외 법석으로 변했다.
한국불교태고종(총무원장 상진 스님)은 10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 특설무대에서 ‘제5회 태고종 영산재 및 태고락(樂) 페스티벌’을 봉행했다. ‘극락도 락(Rock)이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행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영산재와 현대 대중음악을 결합해 전통불교문화의 가치를 시민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오전부터 광화문광장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강풍까지 겹치면서 행사 진행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오후 3시 30분께 빗줄기가 잦아들자 영산재의 막이 올랐다. 무대 중앙에는 삼존불 괘불이 펼쳐졌고, 법고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도심 한복판에 영산회상이 펼쳐졌다. 스님들의 범패와 바라춤, 작법무가 이어지자 광장의 소음은 잠시 잦아든 듯했다. 빗방울 사이로 번지는 목소리와 춤사위에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의례의 무게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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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종 봉원사 국가무형유산 제50호 영산재보존회 스님들이 광화문 특설무대에서 영산재를 시연하고 있다. |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한 영산회상을 재현하는 불교 의식이다. 범패와 작법무, 도량 장엄 등 불교 전통예술이 집약된 의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동시에 살아 있는 이들도 진리를 깨닫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1973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고,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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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정 운경 스님이 법어를 내리고 있다. |
태고종 종정 운경 스님은 법어를 통해 영산재의 의미와 수행자의 자세를 일깨웠다. 운경 스님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자리에 모든 중생이 함께해 법문을 들으라고 당부한 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화두를 들어 정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근본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빗속에서 이어진 의식은 단순한 전통 재현을 넘어, 오늘의 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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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무원장 상진 스님이 봉행사를 하고 있다. |
총무원장 상진 스님은 봉행사에서 영산재를 “한국 전통불교문화의 백미”라고 소개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는 전통과 현대, 종교와 세대를 넘어 모두가 하나 되는 특별한 화합의 장”이라며 “불교가 옛 가르침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호흡 속에서 살아 숨 쉬며 대중과 깊이 교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을 지키는 일과 시대의 언어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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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환 청와대 경청통합수석이 이재명 대통령의 축사를 대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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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정식 국회의장의 영상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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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승 국회 정각회 명예회장의 영상축사 |
정·관계 인사들도 축하의 뜻을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성환 경청통합수석이 대독한 축사에서 태고종이 영산재를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행사로 발전시켜 온 노력을 평가하며, 현대 음악과 대중문화를 결합한 태고락 페스티벌이 “전통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밝혔다. 조정식 국회의장과 이헌승 국회 정각회 명예회장,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등도 전통문화가 세대와 종교를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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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재 시연이 끝난 뒤 관계자들이 '태고락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
영산재에 이어 오후 6시 30분부터는 ‘태고락 페스티벌’이 열렸다. 노브레인과 체리필터, 럼블피쉬, 크랙샷 등 국내 록밴드들이 무대에 올라 광장의 분위기를 바꿨다. 장엄한 범패가 남긴 여운 위로 기타와 드럼의 강렬한 사운드가 쏟아졌다.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과 록 음악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연결한 ‘극락도 락이다’라는 슬로건이 비로소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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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산재의 천수바라와 노브레인의 협연이 진행되고 있다.(사진=태고종) |
특히 영산재의 천수바라와 노브레인의 협연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이날 축제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스님들의 바라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몸짓에 록 음악의 박동이 더해지자 관객들의 호응도 커졌다. 태고종과 럼블피쉬의 협업 무대 역시 종교의례와 대중예술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화과자 만들기와 단청 체험 등 부대 프로그램도 마련돼 시민들이 불교문화를 직접 경험하도록 했다.
이번 행사의 의미는 공연의 이색적인 조합에만 있지 않았다. 사찰과 신행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돼 온 영산재를 광화문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옮기고, 록 음악을 통해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혔다는 데 있다. 전통문화유산이 과거의 흔적으로 남지 않고 오늘의 시민과 만나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무엇보다 이날 광화문에 남은 인상은 궂은 날씨에도 끝내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빗물에 젖은 무대에서도 의례는 정해진 순서대로 이어졌고, 음악은 마지막까지 광장을 울렸다. 우산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 범패와 록은 서로 다른 언어였지만, 그 울림은 한곳으로 향했다. 서로 다른 세대와 취향, 종교를 넘어 함께 머물고 함께 듣는 시간이었다.
비가 그친 뒤에도 광화문광장에는 그날의 선율이 한동안 남아 있었을 것이다. 천수바라의 울림과 록밴드의 함성이 교차한 무대는 전통과 현대가 반드시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빗속에서도 공연을 완주한 이날의 법석은, 오래된 전통이 오늘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