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싸리·참나무 맹아 무성… 불탄 고사목에도 버섯이 새 생명
참나무 새순은 최대 4m 성장… 산불 흔적 속 가을빛 물들어
“숲은 스스로 회복한다”… 인위적 벌목·조림 중심 산림정책에 질문
불교환경연대, 고운사 사찰림 10년간 생태 변화 장기 관찰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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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탄 숲 아래로 단풍이 든 고운사 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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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복원중인 숲 사이 불탄 숲의 모습이 보이는 고운사 |
지난해 3월 대형산불이 휩쓸고 간 경북 의성군 고운사. 한때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던 산자락은 검게 그을린 나무들로 가득하다. 나무들은 불길에 몸통과 가지를 내주고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그 사이로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붉고 노란 단풍이 물들고, 땅 위에는 풀과 꽃이 돋아났다. 불탄 숲이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터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난 11월 1일 고운사 사찰림. 불교환경연대(상임대표 법만 스님)가 마련한 생태탐방에는 울산·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회원과 시민 등 45명이 참여했다. 지난 5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산불 발생 1년 7개월, 자연이 스스로 숲을 되살려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번 탐방의 중심에는 고운사 주지 등운 스님의 선택이 있었다. 등운 스님은 산불 이후 불교계 종단 최초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연복원을 결정했다. 불탄 나무를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는 대신 자연의 회복력에 숲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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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운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등운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늘 푸른 소나무 숲만 보다가 단풍 든 숲으로 변화한 모습을 보니,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며 “자연에 맡기기로 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이규송 강원대 생명과학과 교수(식생), 기경석 상지대 조경산림학과 교수(음향), 김수동 안동환경운동연합 대표가 분야별 강의를 맡았다.
고운사 유역은 산불 이전 전체 산림의 약 84%가 소나무 단순림 또는 소나무 우점 혼합림이었다. 소나무는 산불에 취약하다. 이번 화재로 사찰림의 약 97%가 피해를 입었고, 불길이 나무 꼭대기까지 번지는 수관화까지 발생했다. 숲 전체가 사라진 듯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회복의 신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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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운사 능선에서 현장강의 설명을 듣는 이규송 교수 식생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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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경석 교수와 망원경으로 조류를 관찰하는 조류팀 |
능선을 따라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참싸리였다. 콩과 식물인 참싸리는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해 공기 중 질소를 토양에 공급한다. 산불로 메마르고 척박해진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자연의 일꾼이다. 불탄 소나무 사이사이를 채운 참싸리는 마치 숲의 상처를 보듬듯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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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 고사목 껍질에 핀 치마버섯 |
참나무의 생명력도 놀라웠다. 산불로 줄기와 가지가 타버렸지만 뿌리와 밑동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맹아 현상이 곳곳에서 관찰됐다. 일부 참나무 맹아는 산불 이후 1년 반 만에 최대 4m까지 자랐다. 지난 5월에 관찰했던 신갈나무와 굴참나무의 새순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산불 직후 싹을 틔운 맹아 가운데는 2m를 넘어선 것도 있었다.
죽은 나무에서도 생명은 이어졌다. 검게 그을린 고사목에는 하얀 치마버섯이 자리를 잡았다. 버섯은 죽은 나무를 분해해 숲의 영양분으로 되돌린다. 불에 탄 나무조차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되는 셈이다. 땅에서는 구절초가 꽃을 피웠고, 등검은메뚜기가 풀숲을 뛰어다녔다. 소나무 발아와 참나무 맹아, 참싸리의 생장이 어우러지며 숲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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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더미를 뚫고 자연 발아한 소나무 씨앗 |
가을빛으로 물든 숲의 풍경은 산불 이전과 달랐다. 새카맣게 타 죽은 소나무와 그 아래서 자라난 푸른 활엽수, 붉고 노랗게 물든 잎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숲이었다.
참가자들의 관심은 자연의 회복뿐 아니라 인간이 숲을 복원하는 방식에도 쏠렸다. 그동안 산불 피해지 복구는 불탄 나무를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나무의 맹아와 풀까지 제거되는 경우가 있다. 산불에 상대적으로 강한 활엽수는 불길의 확산을 늦추는 역할도 한다. 자연적으로 숲이 다양성을 회복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건강한 산림을 만드는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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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탐방팀 안동환경운동연합 김수동 대표가 산불 피해 전후 고운사 사진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
한 참가자는 “불탄 소나무 아래 울긋불긋 피어난 활엽수와 숲을 가득 채운 참싸리를 보며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을 느꼈다”며 “동시에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탐방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불탄 나무도 숲의 일부이며, 생태계에서 불필요한 생명은 없다는 것이다. 고사목은 버섯과 미생물의 터전이 되고, 새순은 토양을 붙들며, 풀과 꽃은 곤충과 작은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숲은 인간이 계획한 방식이 아니라 생명들 사이의 연결과 순환을 통해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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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가자들이 일주문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
불교환경연대는 앞으로 고운사 사찰림의 자연복원 과정을 10년간 장기 모니터링할 계획이다. 식생과 야생동물 등 생태계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시민들과 함께 기록한다는 구상이다.
산불은 숲을 태웠지만 숲의 생명력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검게 탄 나무 사이로 찾아온 가을은 자연이 가진 회복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서둘러 숲을 다시 만들려는 손길이 아니라, 숲이 스스로 살아갈 시간을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