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자아가 없는데, 무엇이, 어떻게 윤회하나?
초기불교의 무아와 윤회, 붓다는 왜 ‘나’가 없다고 했을까?
가을에는 실체가 없다
죽음 이후를 묻는 ‘나’는 누구인가? 수행자가 보는 무아와 윤회
(재)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구상진)에서 발행하는 불교계 대표 대중 문화지인 월간『불교문화』 10월호(통권 제314호)가 발간됐다.
이번 10월호 특집에서는 구상진·이필원·이병철·남시중 네 필자가 불교 교리와 초기경전, 뇌과학과 수행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제시하는데 불교의 오래된
질문, 무아와 윤회 - 고정된 '나'가 없다면,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주제로 AI가 죽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재현하는 시대, 인간은 여전히 죽음 이후에도 '나'로 존재하기를 꿈꾼다. 그런데 불교는 영원불변한 '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정된 자아가 없는데 누가 윤회하고, 무엇이 다음 생으로 이어질까?
구상진 이사장은 ‘고정된 자아가 없는데, 무엇이, 어떻게 윤회하나?’ 라는 주제로 불변하는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윤회일까? 『밀린다왕문경』의 등불 비유에 따르면 한 등불에서 다른 등불로 불이 옮겨붙어도 앞선 불꽃 자체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정된 영혼이 아니라 업과 갈애가 빚어낸 인과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상좌부의 결생식, 유식불교의 아뢰야식 등 전통적인 무아윤회 설명을 살펴보고, 결국 중요한 것은 영생이 아니라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길을 끄는 해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필원 교수는 초기불교의 무아와 윤회 ― 붓다는 왜 ‘나’가 없다고 했을까로 부처님은 단순히 “나는 없다”고 가르친 것일까? 『무아상경』과 『숫따니빠따』 등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무아는 몸과 마음을 ‘나’와 ‘내 것’으로 붙드는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다. 특히 『몰리야팍구나 경』에서는 “누가 식(識)의 자양분을 먹는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조건으로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누가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이미 고정된 주체가 전제돼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체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괴로움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조건을 살피는 일이다.
이병철 교수는 가을에는 실체가 없다 ― 뇌과학이 다시 발견한 ‘무아(無我)’라는 주제로 기온과 바람, 단풍의 변화를 묶어 ‘가을’이라 부르듯 우리가 확신하는 ‘나’도 뇌가 만들어 낸 개념일까? 진짜 손과 고무 손을 동시에 자극하면 가짜 손을 내 손처럼 느끼는 ‘고무손 착각’ 실험은 몸에 대한 소유감조차 뇌가 감각정보를 종합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내 과거, 내 걱정, 내 계획’을 반복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와 명상 연구를 통해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다만 뇌과학이 불교의 무아를 완전히 증명했다는 성급한 해석은 경계한다.
남시중 교수는 죽음 이후를 묻는 ‘나’는 누구인가? ― 수행자가 보는 무아와 윤회라는 주제로 죽은 뒤에도 ‘나’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밀린다왕문경』의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설명은 영혼 없는 윤회를 이해하기 위한 교리적 논리이지만, 사후 재생 자체를 입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부모의 유전자와 습관이 자녀에게 이어져도 자녀를 부모의 재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윤회를 무조건 믿거나 미신이라 단정하기보다,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고 싶어 하는 ‘나’의 갈애가 지금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는지 수행자의 눈으로 관찰해 보자고 제안한다.
슬기로운 수행생활 지견 스님 편에서는 새벽 5시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법화경』을 231번째 읽고 있는 월명사 주지 지견 스님. 공양간을 또 하나의 법당으로 여기는 사찰음식 장인의 삶과 수행을 따라간다.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프랑스 행사에서는 정관 스님을 도와 500명분의 사찰음식을 준비하고, 한국의 장 문화를 소개하며 간장 배추샐러드를 선보였다. 사찰 안 카페 ‘가미향’의 수익 일부를 어려운 이웃과 학생에게 나누는 이야기에서는 음식과 기도가 어떻게 자비의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만날 수 있다.
10분으로 배우는 불교는 서유기의 진짜 주인공은 손오공이 아니었다로 손오공·저팔계·사오정과 여행하는 만화 속 삼장법사는 실존했던 어떤 인물일까? 『서유기』의 바탕이 된 것은 당나라 승려 현장의 구법 여행이다. 현장은 불경 번역의 오류와 한계를 바로잡고자 629년 국경 통제를 무릅쓰고 인도로 떠나 나란다에서 공부한 뒤 645년 돌아왔다. 이후 『대반야경』600권을 비롯해 방대한 경전을 번역한 그의 업적을 살피고, 우리가 독송하는『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이라는 명호가 왜 ‘관세음보살’과 다른지도 짚어 본다.
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는 이것이지만, 이것이라고 하면 어긋난다로 “키우던 소를 잃어버렸다.” 한 노파의 호소에 투자대동 선사는 노파를 부르고, 그가 “예” 하고 답하자 “소가 아직 이렇게 있구나!”라고 말한다. 이 선문답에서 소는 불성·본래면목을 상징한다. 십우도에서 소를 찾고 기르는 과정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이미 경험하고 있는 마음을 생각과 언어로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본래의 생생함을 놓치게 된다는 선(禪)의 역설을 만나게 된다.
천년사찰 숲길 걷기명상은 전남 고창 선운사 꽃무릇길로 꽃이 피는 동안 잎은 보이지 않고, 잎이 자랄 때 꽃은 사라지는 선운사 꽃무릇.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이별 꽃’의 전설을 따라 고창 선운사 숲길을 걸으며 퇴직을 앞둔 불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돌아본다. 이때 피할 수 없는 아픔 위에 스스로 두려움을 보태는 불교의 ‘두 번째 화살’ 비유가 떠오른다. 붉게 피고 지는 꽃무릇 사이에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호흡명상을 통해, 풍경은 그대로여도 마음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정여울 작가의 이럴 땐 이 책을!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분노에서 귀환으로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린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죽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으러 온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함께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법구경』의 “미움은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어 영원히 살게 해 주겠다는 여신의 제안을 뒤로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성공과 인정에 매달리는 현대인에게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묻는다. 분노에서 공감으로, 명예에서 일상의 소중함으로 시선을 옮기는 고전 읽기이다.
이한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