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수행을 나눔과 봉사, 사회적 실천으로 꽃피우다
‘자정 85초 전’ 인류의 위기 앞에 던지는 화두… “당신은 지금 마음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보리행전
김기원 지음
에이원북스
22,000원
“공부해서 어디에 쓰실 겁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관통한 질문이 있다. 많이 배우고 깊이 깨닫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마음을 닦고 수련하는 궁극의 목적은 무엇인가. 보리 김기원의 신간 『보리행전』은 이 질문 하나를 품고 살아온 한 인간의 구도(求道) 여정이자, 깨달음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묻는 삶의 기록이다.
1980년 큰스승 한울 김준원 선생과 사제의 인연을 맺은 저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수련하고, 세상과 부딪치고, 때로는 넘어지며 배움의 참뜻을 찾아왔다. 책은 성공한 수행자의 완성된 깨달음을 자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집착, 오해와 부끄러움까지 드러내며 한 인간이 스승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걸어온 시간을 솔직하게 펼쳐 보인다.
책을 관통하는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묵직하다. “마음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는 스승의 말씀이다. 마음을 다스려 나만의 평온을 얻는 데 그치지 말고, 그 마음을 사람에게 쓰고 세상에 쓰며 생명을 살리는 데 쓰라는 뜻이다. 아무리 고매한 철학과 깊은 수행도 현실에서 누군가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앎’과 ‘삶’의 문제로 풀어낸다. 아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는 얘기다. 한울 김준원 선생이 정립한 한울사상과 가르침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작동하는 도(道)로 제시된다.
특히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가르침이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낙동강 살리기 운동, 남는 우유를 이웃과 나누는 ‘밝은 새싹회’, 알뜰 소비 서명 운동, 장애인을 위한 ‘해뜨는 교실’ 등이 대표적이다. 한울 선생은 뜻을 세운 제자들의 활동에 지혜와 성원을 보태며 배움이 사회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며 남성 제자들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여성들을 정성껏 대접하도록 한 일화도 인상적이다. 평등과 존중을 입으로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으로 익히게 한 것이다. 바른말·바른씀 운동, 장묘문화 개선, 금 모으기 운동, 의료봉사와 장학사업, 재난 구호 등으로 이어지는 활동에서도 같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수행은 산속의 고요한 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아픈 곳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메시지다.
책은 개인과 사회를 넘어 세계와 인류의 문제로 시선을 넓힌다. 프롤로그의 고베 지진을 시작으로 유럽과 불국사 순례, 도산 안창호와 반야심경,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되짚는 여정이 펼쳐진다. 민들레 한 송이에서 생명의 연결을 발견하고, 전쟁과 분단의 역사 앞에서는 원한을 넘어서는 화해와 평화를 생각한다.
저자가 스승에게 배운 핵심 개념인 ‘회로(回路)’도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로는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마음과 세상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서로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으로 이어진다.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 그것이 보살행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부제인 ‘자정 85초 전’은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절박함을 상징한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됐지만, 인간의 마음도 그만큼 성숙해졌는가. 더 큰 힘을 손에 쥔 우리는 그 힘을 더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가. 저자는 현대 문명의 발전 속도와 인간 정신의 성숙 사이에 놓인 간극을 날카롭게 짚는다.
그렇다고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는 않는다. 평화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마음속 증오 하나를 내려놓고, 사람 사이의 벽 하나를 허물며, 서로에게 겨눈 작은 총구 하나를 거두는 일.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어도 내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일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48년 울산에서 태어난 저자 김기원은 1980년 한울 김준원 선생과 인연을 맺은 뒤 사회 계몽운동과 나눔, 문화교류 등 다양한 현장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해 왔다. 한울정신문화원 창립 이사로 활동했으며, 환경·소비·문화 분야의 사회운동과 해외 문화교류에도 참여했다. 저서로는 『보리는 보리를 먹어야』, 『지금 우째 소를 타노』 등이 있다.
『보리행전』은 수행의 깊이를 자랑하는 책이 아니라 그 깊이를 삶으로 증명하려는 책이다. 종교와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뿐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다시 묻고 싶은 사람,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성찰을 건넨다.
책장을 덮고 나면 스승의 첫 질문이 독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가 아니라, 배운 것을 누구를 위해 썼느냐는 물음이다. 결국 깨달음은 말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오늘, 내 마음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보리행전』이 독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