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스님의 사찰음식, 계절을 담아내는 수행의 맛
서정민 다례, 향기로운 침묵으로 이어지는 교감의 시간
아더와 소리스, 전통과 현대의 선율로 물든 산사
타종 울림 따라 번지는 연대, 문화외교의 새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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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30일 길상사 '가을향유' 참석 내빈들이 해가 기울어가는 설법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인근에 40여 개국의 대사관저가 자리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 늦은 9월의 저녁, 산문을 넘어서는 바람에는 은은한 풀 향이 실려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라는 말이 공기처럼 스며든 이곳에, 유럽연합(EU) 대표부와 22개국 외교사절이 한자리에 모였다. 말은 달라도 저녁의 온도는 같았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이 모여 앉아 사찰음식과 차를 기다리는 동안, 해는 서서히 법당 뒤편으로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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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 외교관들이 한국차인연합회 우현다례원 서정민 원장이 준비한 차를 음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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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 외교관들이 대안 스님(왼쪽)이 준비한 사찰음식을 살펴보고 있다. |
이날 자리에는 길상사 주지 덕조 스님을 비롯해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 성북구사찰연합회장 원경 스님이 함께했고, 이승로 성북구청장과 김영배·김남근 국회의원, 양순임 성북구의회 의장, 오훈 종암경찰서장 등 지역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여기에 유럽연합 대표부와 노르웨이·네덜란드·튀르키예 등 22개국 외교사절단이 더해져, 설법전은 각국의 언어와 미소가 교차하는 작은 세계가 되었다. 서로의 이름을 조심스레 부르고 인사를 건네는 장면마다, 낯섦은 이내 따뜻한 온기로 바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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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상사 주지 덕조 스님(왼쪽)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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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로 성북구청장(왼쪽)이 축사를 하고 있다. |
오후 다섯 시, 설법전에는 잔잔한 기대가 번졌다. 덕조 스님은 “한 그릇의 음식과 한 잔의 차에 담긴 정성이 오늘의 인연을 깊게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짧은 인사였지만,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종소리처럼 사람들 마음에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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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자들이 덕조 스님의 환영사를 경청하고 있다. |
이날의 중심에는 사찰음식 명장 대안 스님이 있었다. 스님의 손끝에서 시작된 32가지 사찰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의 수행처럼 차려졌다. 전채로 오른 감자국수는 투명한 면발 속에 가을의 서늘함을 담았고, 배보쌈 물김치는 배의 단맛과 발효의 깊이가 어우러져 입안에 맑은 여운을 남겼다.
이어진 냉채에서는 월과채와 연근샐러드, 감자뭉생이가 조용히 계절을 이야기했다. 기름기 없이도 충분히 깊은 맛, 자극 없이도 오래 머무는 향. 대안 스님은 “뿌리와 줄기에서 얻은 자연의 힘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처럼 음식은 말없이도 많은 것을 전했다.
온채에 이르러서는 녹두전의 고소한 온기와 석이버섯강정의 바삭한 식감, 발효두부구이의 은근한 풍미가 식탁 위에서 작은 합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본상, 능이국의 향이 은은히 퍼질 때 사람들은 비로소 이 저녁이 ‘맛’이 아니라 ‘시간’을 나누는 자리임을 깨닫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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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 외교관들이 사찰음식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
한쪽에서는 직접 가지새싹말이를 만드는 체험이 이어졌다. 외교사절과 지역 인사들이 함께 손을 움직이며 웃음을 나누는 장면은, 말보다 먼저 마음이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낯선 손놀림에도 웃음이 번졌고, 서로의 접시를 바라보며 건네는 짧은 감탄이 언어를 대신했다. 음식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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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자들이 사찰음식으로 저녁 공양을 하고 있다. |
식사의 끝은 차와 다식이었다. 하동의 녹차와 보성의 발효차가 잔에 담기자, 설법전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인삼꽃정과의 은은한 단맛, 흑임자꽃 다식의 깊은 고소함, 체리란의 섬세한 형태가 가을의 끝자락을 닮아 있었다. 다례를 맡은 서정민 원장은 “차는 잠시 멈추는 시간”이라 했고, 사람들은 그 말에 응답하듯 천천히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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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상사 주지 덕조 스님(오른쪽)이 '가을향유'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
저녁 일곱 시, 범종이 울렸다. 산사의 공기를 가르는 깊은 울림은 이곳에 모인 이들의 국적과 언어를 넘어 하나의 호흡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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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아더의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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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아더의 공연 |
이어진 공연에서는 가수 아더의 목소리가 첫 장을 열었다. 젊은 감각이 묻어나는 음색은 산사의 고요와 어우러져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예술이음 소리스의 무대는 더욱 다채로웠다. ‘연화’에서 ‘범 내려온다’에 이르기까지, 전통의 선율 위에 현대적 리듬이 얹히며 관객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장구의 박자와 대금의 숨결, 가야금의 잔향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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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이음 소리스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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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이음 소리스 공연 |
마지막 ‘노는 마당’에서는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서툰 발음도, 다른 억양도 그 순간에는 모두 자연스러웠다. 음악은 그렇게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날 길상사의 밤은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잔잔했다. 그러나 그 잔잔함 속에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 문화를 나누려는 진심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드문드문 내리는 가을비의 촉촉함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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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자들이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
행사가 끝나갈 무렵, 한 외교관은 “이곳의 고요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길상사의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차 한 잔, 음식 한 접시, 그리고 한 번의 종소리. 그 단순한 것들이 모여 국경을 넘고 마음을 잇는 밤. 길상사의 ‘가을향유’는 그렇게, 말보다 깊은 언어로 서로를 기억하게 했다.